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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수교 140주년과 기독교] 중국, 미국에 “조선의 공동보호국 되자” 제안

중국, 미국에 “조선의 공동보호국 되자” 제안

[한미수교 140주년과 기독교] 조미조약과 중국의 속방조관 문제 (6)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나라는 중국이었다. 조미조약을 작성하는데 가장 큰 노력을 한 사람은 중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었다. 그는 미국의 슈펠트를 중국으로 초청해 자신의 담당 지역인 톈진에서 조미조약을 작성했다. 슈펠트는 이 조약을 인천으로 갖고 와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면 왜 중국은 조미조약을 맺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을까. 이는 조미조약을 통해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이라는 것을 명문화해 국제 사회에 알리고, 조선을 중국의 지배하에 묶어 두려 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주변에 많은 속방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버마(미얀마)는 영국에, 베트남은 프랑스에, 오키나와는 일본에 뺏기고 말았다. 특히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을 넘보고 있었다. 더욱이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빼앗은 러시아는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조선마저 잃게 된다면 중국의 안보는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조선 문제는 중국 외교의 중요한 과제였다. 주일 중국공사 하여장은 여기에 대해 3책을 제시했다. 상책은 조선을 중국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요, 중책은 중국 관료를 파견해 직접 통치하는 것이고, 하책은 서양 제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제1조에 ‘대청국의 명에 의해서’ 조약을 체결했다는 내용을 삽입해 대외적으로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천명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우선 하책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홍장은 ‘대청국의 명에 의하여’라는 말보다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방이었다’는 말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1876년 맺은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중국의 종주권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조약 제1조에 조선은 자주국이라 돼 있는데, 일본은 이를 근거로 중국에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조일조약은 또 미국이 조미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조선이 자주국이라고 돼 있다면 이제 미국은 중국의 간섭없이 일본의 도움으로 조선과 조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만일 일본의 중재로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는다면 조선에 대한 자신의 종주권을 잃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중국은 자신의 중재 아래 서둘러 조미조약을 맺고자 했다.

1882년 봄, 중국 톈진에서는 조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됐다. 이홍장은 조선의 의견을 참조해 슈펠트에게 조선 측 안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속방조관, 영사재판권 제한, 관세 세칙 제정, 그리고 기독교 금지가 들어 있었다. 미국은 조선이 서양세력과 처음 맺는 조약이므로 조선 측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다. 영사재판권과 관세문제는 조선 측 의견대로 했고, 기독교 금지 항목은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소위 속방조관 문제였다.

조선 측 제안 제1조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언급과 함께 미국은 중국과 함께 조선을 보호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것은 미국이 중국과 함께 ‘조선의 공동보호국(Joint Protectors of Corea)’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학자들은 공동 종주권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동시에 미국을 조선에 대한 공동 종주국으로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슈펠트는 미국은 조선을 만국공법의 질서에 의해 대등한 조약 당사자로 인정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만일 조선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을 수 없다면 조미조약은 체결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선과 통상을 위해서 왔지 조선을 미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조선을 지배하러 온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중국이 조미조약에서 원했던 것은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것을 온 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국의 시도는 미국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물론 미국은 중국에 양보해 조선 정부가 과거 중국의 속방이었다는 것을 별도의 문서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을 수용했다. 하지만 이는 별도의 문서였다. 조미조약은 조선을 하나의 당당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도 당시 세계 제일의 국가로 등장한 미국에 조선은 대등한 국가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속방으로 살던 조선으로서는 너무도 귀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은 조선 정부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중국은 조선이 중국의 속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1882년 8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발표하며 조선은 중국의 속방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중국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고종을 구한 다음 1885년 위안스카이(원세개)를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임명해 조선을 통치했다. 조선이 중국의 속방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배한 다음이었다.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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