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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희년 이야기] 희년의 사람, 큰아버지를 추모하며

희년의 사람, 큰아버지를 추모하며

아버지는 자매가 없이 사형제 가운데 셋째이셨다. 네 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사시다가 소천하시고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 그 중 맨 위의 첫째 큰아버지에게 우리 가족은 큰 은혜를 받았다.

큰아버지는 일찍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셨는데, 당신의 조카들인 우리 삼형제(두형과 나)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셨다. 학창시절의 우리 삼형제에게 해마다 학용품 선물과 함께 장문의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에는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신다는 말씀과 더불어 신앙과 인생과 학업에 대한 사랑의 권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집안 형편이 어려운 우리 삼형제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그 대학 학비를 모두 책임지시고 캐나다에서 해마다 송금해주시기까지 하셨다. 큰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미 넷이나 있었는데도 우리 삼형제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보신 것이다.

또한 내게는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의 <Economics>(경제학)를 비롯한 영문 원서들을 여러 권 보내주기도 하셨다. 그리고 내가 늦게 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을 비롯한 주요 영문 신학 자료들을 보내주기도 하셨다.

만약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북미로 유학을 가려 했다면 아마 그것도 큰아버지는 도와주셨을 것이다. 내 기억에 어느 해 편지에서 그런 뜻을 말씀하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이미 희년 단체의 간사로서 토지평등권 개혁을 중심으로 희년 사역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캐나다 한인 이민 1세대이자 미생물학자로 캐나다 보건복지부 (Health and Welfare Canada) 산하 식품안전 연구소에서 1970년부터 1997년까지 27년 동안 근무하셨다. <(한국–캐나다 수교 50주년) 캐나다 한인이민사 – 오타와>에는 큰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970년도에 Health and Welfare Canada에 취업한 과학자 박종일(큰아버지: 인용자) 박사의 경우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조교수로 근무 중 캐나다에 있는 노벨수상자의 초청으로 캐나다로 이민 오게 됐다.”(13쪽).

“연방정부에 취업했던 초창기 한인 이민 1세(1960-80년까지 20년간) 그리고 1980년대 상반기에 취업한 사람들은 2012년 현재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정년퇴직 또는 명예퇴직)했다. 그들은 이민 현장의 모든 어려움(주로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불굴의 투지, 도전 그리고 지혜로써 극복했으며, 정부에 근무 기간 중 담당분야의 전문가(실무자 또는 기술관료)로써 한국인의 근면함과 우수한 두뇌를 동료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며, 이민 1세의 태생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긍지와 캐나다의 국위를 높이는데 많은 공적을 세웠다.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업적을 인정받은 한인 이민 1세 몇 사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생물학자로서 27년간(1970-97) 근무한 박종일 박사는 2005년 9월 30일자 한카 타임즈 김은주 기자와의 인터뷰(외길인생 미생물학자 박종일 박사, 정든 오타와를 떠나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국 오하이오주 주립 대학교 조교수로 있을 때 토론토에 있는 노벨상 수상자 Banting 박사의 연구소(Banting & Best Department of Medical Research)에 초청되어 1968년에 캐나다로 오게 된 것인데, 그 후 연방정부(Health & Welfare)에 근무하고 있던 노벨상 수상자인 핼스버그의 초청으로 Health & Welfare Canada의 실험실에 식품안전에 대한 독창적 연구를 27년간 하게 된 것이었다.”며 “그 당시 나의 목표는 노벨상이었지요, 미생물 연구에 혼신적인 열정을 바쳤어요”고 말했다. 

이어 “그 시절 나는 오로지 미생물과의 전쟁을 하는 기분으로 휴일도 없이 밤잠을 설쳐가면서 연구에 몰두했어요”. 박종일 박사는 약 200 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으며, 식품안전에 대한 교본(Manual)을 편찬하는 데 공헌하여 Microbiology Chapter를 직접 집필했다.”(14-15쪽).

이처럼 큰아버지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분이셨다. 또한 오타와한인교회 창립 주역으로 초대 장로로 장립되셨는데(1983년), 교회를 위해 평생을 봉사하셨다. 그리고 오타와한인회 회장을 맡아(제9대 회장, 1972년), 교민들을 위해서도 봉사하셨다.

큰아버지는 개혁주의(칼빈주의) 신앙을 견지하신 진정한 보수주의자셨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사셨다. 큰아버지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우리 삼형제는 그 큰 사랑을 받았다.

큰아버지를 생각하면, 희년법의 근족(近族, 가까운 친족, 고엘)이 떠오른다. 희년정신의 핵심은 근족의 대속 정신인데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가난 때문에 땅과 집을 팔고 남의 집에 머슴으로 팔려가면, 그 근족이 자기 손해를 무릅쓰고 대신 값을 치러서 그 가난한 사람이 잃어버린 땅과 집을 물러(되찾아) 주고, 속량해 준다(레위기 25장).

이 밤 희년 정신을 실천하신 큰아버지를 추모한다. 그 믿음과 사랑을 기억하고, 깊이 감사드린다.그리고 나도 큰아버지처럼 희년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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