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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은혜 (1) 자발적 호의와 행위

은혜 (1) 자발적 호의와 행위

은혜가 아닌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단점 때문에 보류되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실패와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즉,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인정되는 곳에는 은혜가 행사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인간의 단점 때문에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죄인의 삶과 성품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사한다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죄가 많은 자는 더 많은 은혜를 그리고 죄가 적은 자는 적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이론은 모든 죄인에게 측량할 수 없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셋째, 받은 것에 빚을 지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어떤 조건에서든 부채가 발생한다면 그 행위는 결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보상없이 행해지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에 입은 혜택에 관해 지불을 이행하게 된다면 은혜가 아닙니다. 넷째, 공로자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순수한 은혜는 인간 공로의 모든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일하는 자에게 그 삯은 은혜로 여기지 않고 빚으로 여깁니다. 다섯째, 빚을 과하게 갚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정당한 빚을 갚는 일로 조금이라도 엮이게 되면 더 이상 은혜는 아닙니다. 은혜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할 대로 하지 않고 마땅히 받아야할 것보다 더 좋게 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한한 선함으로 표현되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여섯째,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가 크셔서 죄인을 즉각 용서한다는 이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이며, 은혜의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구원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불신자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은혜의 일부지만, 거듭난 자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은혜는 지속됩니다. 

   이 일곱 가지는 은혜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달라스 신학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지냈던 루이스 세퍼가 제시한 내용입니다. 그는 은혜는 무한하고 영원성과 관련된 단어로 하나님의 성품과 무한한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친절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멀리까지 미치며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최고의 동기를 나타낸다. 그분의 우주 창조와 보존 그리고 완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 단어보다 더 위대한 진리가 있을까?” 

   은혜는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과분한 호의이며 값없이 주시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로 번역된 희랍어는 “카리스”입니다. 희랍어 구약성경 (LXX)은 히브리어 “헨”을 카리스로 번역합니다. 헨은 애원자가 우월한 사람의 눈에서 찾은 호의이며, 호의를 베푼 사람은 자신이 준 것에 대하여 법적으로 어떤 요구를 할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원리는 보아스와 룻의 관계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무 소유가 없는 이방 여인 룻은 예루살렘 지역 유지인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습니다. 보아스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합니다. 룻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헨은 보아스와 룻의 관계처럼 일반적으로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특별한 유대나 관계가 없이 베풀어지는 친절과 호의를 뜻합니다. 당사자들 사이에 선행 유대가 없기 때문에 우월자가 호의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비난도 받지 않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룻은 보아스에게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니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라고 감사합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과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은혜를 준 것입니다. 

   누군가 은혜를 얻었거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할 때,  강조점은 속박되지 않고 사랑하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도바울은 회심하기 전의 자신을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자”라고 소개한 후에, 현재의 자신을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의 언에서 확인 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사람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바울은 어떤 주의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위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선택적이고, 무조건적이고, 과분한 사랑입니다. 모세는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작은 민족입니다.여호와께서는 다만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큰 능력과 놀라운 기적으로 이집트 왕 바로의 노예 생활에서 여러분을 구출해 내신 것입니다.” 

   이 문장의 헬라어 구약성경은 은혜를 뜻하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번역되는 아가페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것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실패없는 사랑,” “확고한 사랑,” 또는 “신실한 사랑”을 뜻합니다. 헤세드의 기본 사상은 하나님의 충성심입니다. 이 낱말은 하나님 자신이 맹세하신 백성에 대한 단호한 충성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을 자녀 삼아서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사용하겠다는 약속한 언약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언약의 의무를 불충실하여 일시적인 심판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굳건히 서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헤세드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실효성을 강조합니다.
  은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인 선으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언급은 그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은혜는 사람이 하는 기도와 선행을 통해 자동으로 켜지는 비인격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손입니다. 이 은혜를 삶을 통해 체험한 존 뉴톤은 이런 찬양 시를 썼습니다. “놀라운 은혜 그 말이 얼마나 달콤한가? 그 은혜는 비열한 나를 구원했네. 한 때 잃었던 나의 인생 이제는 찾았네. 흑암의 인생이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의 은혜로 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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