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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기쁨 (2) “고통이 창조한 춤 dancing”

기쁨 (2) “고통이 창조한 춤 dancing”

“내가 이미 언급한 기쁨에 관해서 할 말이 더 있다.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특별한 기쁨있다. 그들은 버스에서 보는 수많은 건강한 사람들의 침울한 표정과 놀라울 정도로 대조되는 기쁨이 있다.  이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글쎄, 내 생각에는 그들의 삶에는 영구적인 용기가 필요하고, 끊임없는 용기의 소비가 요구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기는 영적 경제에 속하므로 더 많이 쓸수록 더 많이 갖게 된다.  용기는 그들을 통해 흐르는 물결과 같으며 운명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선사한다.  승리의 기쁨은 위대한 위업을 성취한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다. 즉 북벽을 거쳐 아이거 산  (스위스에 위치한 알프스 산맥의 산으로 북벽은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정상에 도달한 등반가들에게서, 그리고 스포츠의 모든 챔피언들이  너무 힘겨워 비록 결승점에서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더라도 그들에게서 발견된다. 더욱이 중증 장애인에게는 일회적인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매일 승리의 기쁨이 경험된다.  삶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소유보다는 현실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곳에서 더 많이 온다.”

   위의 글은 스위스 제네바의 내과 의사이자 정신의학자였던 폴 투르니에가 88년의 생을 마무리하기 전에 저술한 『창조적 고통 Creative Suffering』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의 환자들을 관찰하면서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요인은 아니지만 고통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사건들은 우리에게 고통이나 기쁨을 주지만 우리의 성장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곧 우리의 내적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상실과 고통은 창조성을 캐내기 위한 특별한 기회다” 라고 말합니다. 고통이 기쁨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던 것처럼,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립니다. 

   고통이 창조하는 기쁨은 희랍어 “카라”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 “카르-”에서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 은사 혹은 혜택을 뜻하는 “카리스마,” 즐거움과 행복을 뜻하는 “카이로,” “용서하다” 또는 “호의를 베풀다”를 뜻하는 “카리조마이,” “친절을 베풀다”를 뜻하는 “카리토오,”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토스,” 그리고 “함께 즐거워하다”와 “축하하다”을 뜻하는 “숙카이로”가 파생되었습니다. 이 단어들의 어원적 연관성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암시합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기쁨은 하나님의 도움심과 선한 행위에 반응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찬양과 경외하는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행위가 개인이나 사회 공동체나 혹은 나라에 나타날 때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의 선물은 인간 내면에 기쁨을 작동시켰습니다. 이 원리를 어떤 유대 시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삶에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벅찬 기쁨으로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 깊은 곳에 기쁨을 일어나게 하는 원리는 선지자의 글에도 나타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 고대 사회에서 그리스도는 “기쁨의 빛”으로 이해 되었습니다.  이 빛은 어둠 속에서 발산되는 기쁨의 빛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낱말은 고통의 때에 자주 사용됩니다. 기쁨은 상황이 긍정적이고 희망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절망적인 때에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받게 되는 대우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기쁨은 핍박 중에 작동합니다. “즐거워하라”는 기쁨을 참지 못해 크게 뜀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복음은 “기뻐하고 뛰놀라”라고 라고 기록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표현보다 더 격렬한 기쁨, 깡충깡충 뜀의 기쁨을 가리킵니다.  

   고통 중에 작동되는 기쁨은 의사 누가의 글에도 나타닙니다. 초기 교회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관해서 가르칠 때, 당시 사회 권력층이었던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복음 전하는 것을 금지시킵니다. 그 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욕과 함께 채찍질을 당했을 때, 사도들의 반응은 기쁨이었습니다.  교회 역사상 첫 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쫓겨납니다. 그 때,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의 글에는 이 기쁨은 환경과 상관 없이 작동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믿음과 봉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 부으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와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글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사형의 때를 기다릴 때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 쓰고,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여러분은 많은 환난 중에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가지셨다”고 씁니다. 현실을 초월해서 작동되는 그 기쁨의 근원은 성령입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포악한 박해를 피해 이국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기쁨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은 환경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핍박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통과 기쁨의 관계는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습니다.  고통은 변장된 기쁨입니다. 고통과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 방식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고통과 기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애통은 우리를 초라하게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 냉정하게 일깨워 준다. 그러나 바로 그곳이 춤추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일어나 첫 스텝을 내딛게 하시는 곳이다. 고통과 가난과 불편함 속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떠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우리의 슬픔으로 들어와 우리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켜 세우며 춤을 청하신다.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슬픔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상황을 기쁨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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