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1) “정복하고 새로 태어난 즐거움”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했습니다.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입니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시간 정도는 자리에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곤 합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말기 환자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기쁨이 가득합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 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묻습니다. 그는 창문 밑을 내려다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호수에 백조와 오리들이 한가로이 떠 있고, 아이들이 호수 가 한편에서 모형 배를 띄우고, 호수 주변으로 연인들이 손을 잡고 산책하고 있어요. 꽃들도 아름답게 피어 있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집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은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창가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둡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병원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비어 있는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됩니다. 그는 옮기자마자,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 밖을 내다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 밖에는 회색 콘크리트 담벼락뿐입니다. 폐암 환자의 기쁨은 환경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으로 번역 되는 희랍어 “카라”는 더 나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거나 직접적으로 느끼는 현상으로, 자기 존재의 최고조가 경험되는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감정의 상태입니다. 카라는 목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움직 안에 있는 자기 존재로서 기쁨은 자기 동일시입니다. 그 징후들은 눈물로도 타나납니다.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기쁨이 나를 덮쳤으며, 그것은 나로 눈물을 흘리게 시도했다. 네, 그래서 내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기쁨은 마음 속에 소망하는 것을 정복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일어납니다.
호메로스의 작품에 기쁨은 감정의 가장 격한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전쟁 영웅 아이아스 (Aias)가 승리를 점치는 제비 뽑기에서 자신이 당첨될 것이 확실해 지자 마음에 기쁨이 가득한 채 말합니다. “친구들이여, 제비는 확실히 내것이요! 내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하오! 이제 내가 훌륭하게 헥토르를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오!” 죽음과 생의 갈림 터인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한다는 확신은 아이아스의 감정을 극에 다다르게 했던 것입니다. 아직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기쁨을 얻었던 것입니다.
고대 헬라 문화에서 카라는 종교 예식의 축제에 있는 기쁨을 의미했습니다. 카라의 근본적인 분위기는 신비한 경건 속에 존재했습니다. 율리우스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당신은 어둠과 비참한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거기에는 오물, 불결함, 어둠의 안개, 그리고 영원한 밤의 공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밝은 빛이 조금이라도 당신을 비추기를 원한다면, 얼굴을 들고 움푹 들어간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이 광야에서 ‘나는 기쁨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그분 그리스도께 당신 자신을 데려오십시오. 그분의 신성한 교훈은 이 지상에서 우리의 일상이 빛을 발하게 할 것입니다.”
이 단어의 배경은 기쁨은 내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를 발견할 때 얻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또한 직면한 현실을 정복할 수 있는 나를 확인 했을 때 기쁨이 나타나며, 나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 왔을 때만 나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카라는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다는 것을 알립니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 진리를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이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시편 저자도 이 기쁨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 기쁨과 함께 살았던 다윗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다윗이 체험했던 그 기쁨은 물질적 소유와 그것의 많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 소망하던 현실을 정복한 자신을 확인한 것이며, 자신의 삶에 계신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글에 이 원리를 반복하여 기록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예수님께서도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인간의 기쁨은 주님의 공급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현실을 극복하고 기쁨을 얻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때 환경을 이기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매튜 아놀드는 “정복하고 새로 태어난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섯 자녀의 어머니인 캐리 브렉(Carrie Breck)은 이 기쁨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주의 사랑 비칠 때에 기쁨 오네. 근심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 것 물리쳐. 주의 사랑 비칠 때 기쁨오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충만하게 비칠 때에 찬송하네.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화평함과 기쁨 주네 그 큰 사랑.”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진정한 기쁨을 얻습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