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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인내 (1), 진노와 은혜 사이

인내 (1), 진노와 은혜 사이

기원전 180년에 쓰인 『시라크의 지혜』는 초기 교회 성도들이 자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집회 때에 사용한다 해서 “교회의 책,” “모임의 책,” 혹은 “집회서”라고도 부릅니다. 이 책에는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인간 속에 무슨 선이 있으며 또 악은 무엇인가? 인간의 수명이 최고로 산대도 백 년을 넘지 못한다. 인간이 사는 그 몇 해를 영원에 비하면 대양의 물 한 방울이요 백사장의 모래 한 알이다. 주님께서 인간들을 오래 참아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자비를 쏟아 주시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주님은 인간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내다 보시며 또한 알고 계신다. 그래서 더 많은 용서를 베푸신다. 사람의 동정심은 그의 이웃에 있지만, 주님의 자비는 모든 인간에게 미친다. 그래서 주님은 꾸짖으시고 고쳐주시고 가르치신다. 목자가 양떼를 몰듯, 주님은 인간을 옳은 길로 인도하신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약하고 악에 대한 성향이 있으며 그를 둘러싼 많은 질병에 수명이 단축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죄에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참아 주십니다. 그들의 파멸을 막기 위해 불길한 경고와 함께 은혜를 베푸셔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자비를 얻지 못하면 쓸모 없는 인간의 태도에 분노와 증오 대신 오히려 자비를 행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성한 행위를 희랍어로 “마크로뚜미아”라  불렀습니다.

   “인내”로 번역되는 “마크로뚜미아”는 죄를 범한 죄수 혹은 빚을 진 채무자를 위한 구원의 기회를 뜻합니다. 히랍어 학자 호르스트 (Horst)는 진노와 하나님의 은혜는 “마크로뚜미아”의 기간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마크로뚜미아를 이루는 첫번째 기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거역하는자에게 무서운 분이심을 상세하게 그리고 반복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악한 사람에게 보복하시며 몹시 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주를 거스르는 사람에게 보복하시며 원수에게 노하신다. . . 주께서 노하시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다. 주의 크신 진노를 아무도 당하지 못한다. 주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바위가 부서진다.” 진노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자에게 대응하시는 하나님의 응보적 행위입니다. 

   마크로뚜미아를 이루는 또 다른 기둥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대상을 당장에 벌하지 않으시고 일정 기간 동안 참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표현하는 이 낱말은 은혜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심판 대신에 오히려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마크로투미아로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나님의 성품인 인내는 인간을 위한 구원하기 위한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내의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인간의 구원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크로뚜미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손이 있으시고 그 손을 움직여 죄에 대하여 즉각 반응하셨다면, 이 세상은 이미 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내”를 통해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을 참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광분하여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이 심판 대신에 자비를 얻은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무기한적이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은 이 사실을 잘 말씀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인내의 약속뿐만 아니라 진노의 심판에 관한 약속도 반드시 성취합니다. 인간의 회개를 위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기간을 소흘히 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교회의 책”에는 이 원리를 동일하게 적고 있습니다. “ ‘내가 죄를 지었지만 아무 탈도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오래 참아 주시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용서만 믿고 방심하면 죄를 짓고 또 짓게 된다. ‘주님의 자비가 크시니 내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용서하시리라’고  말하지 말아라. 주님은 자비도 베푸시지만 노하기도 하신다. 한 번 노하시면 죄인들이 남아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마크로뚜미아는 진노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빚을 값기 전까지, 진노의 실제적인 행동을 지체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의 기간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받는 신앙의 세계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인내의 가치에 관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같은 인내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께 인정받아 은혜를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조언합니다.  청교도들은 인내에 관해 “내 인내심을 늘리는 것이 내 문제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고 믿었습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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