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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인내 (2) 기독교의 미덕 美德

인내 (2) 기독교의 미덕 美德

다윗은 드디어 복수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3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쫓아 오던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자신이 숨어 있는 동굴 깊은 곳에 들어 온 것입니다. “오늘이 여호와께서 ‘내가 네 적을 너에게 넘겨 줄 테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고 말씀하신 그 날입니다”라고, 다윗의 동료들이 그를 재촉합니다. 다윗은 일을 보는 사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옷자락을 잘라 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울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왕이오. 그렇기 때문에 사울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안되오”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동굴 밖으로 나갔을 때, 다윗은 “내 주 왕이시여! 여호와께서 오늘 동굴에서 왕을 내 손에 맡기신 것을 당신도 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왕을 죽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왕의 옷자락만 잘라 내고 죽이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사울은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고 응답합니다. 다윗은 복수를 거부했습니다. 

     “인내”로 번역되는 희랍어 “휴포모네”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에 대하여 반응하는 마음의 자세로 사용됩니다. 초기 기독교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 낱말을 다윗처럼 “마음만 먹으면 복수할 수 있지만 복수를 거부하는 영혼”으로 정의했습니다. 라이트풋은 그것을 결코 보복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설명합니다. 휴포모네는 “아래 under”를 뜻하는 “휴포”와 “거하다 또는 머무르다 stay or well”의 합성어로 선한 일을 위해 고난과 박해 혹은 순교와 같은 중압 아래서 참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휴포모네,” 즉 인내를 기독인의 미덕 중 하나로 중하게 여겼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선택 사항이 아닌 모든 상황에서 실천해야 하는 신앙의 미덕이었습니다.    

   신앙인의 미덕 (virtue)인 인내는 일반 희랍 사람들의 인내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에 위대한 미덕은 꺾이지 않는 자존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어떤 모욕이나 부상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희랍 사회에서 위대한 사람이란 복수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카비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로마인들은 그 지방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계획대로 끈기 있게 그곳을 모두 장악했다. 그리고 세상 끝들에서 쳐들어온 임금들을 무찌르고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생존자들은 해마다 로마에 조공을 바쳤다.” 전 세계 패권은 자국에 속했다고 믿었던 로마인들에게 패배는 평화를 잃는 것이므로, 그들은 정복할 때까지 끈기있게 전쟁했던 것입니다.   

   복수를 거절하는 기독교의 미덕과 끝까지 복수하는 세속적 미덕의 추구하는 방향은 정 반대이지만, 두 미덕의 동일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은 휴포모네에 담긴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죽음의 자리였던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사도 요한도 자신의 삶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신앙인들에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조언합니다. 신약성경은 인내가 그리스도인에게 왜 미덕이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첫째, 인내는 그리스도가 보이신 신앙의 모범입니다. 주님은 큰 불의를 인내로 견디어 우리의 구원을 이뤘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인내하는 신앙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숭고한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원칙을 자세히 기술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인내는 악한 세대 속에 불의와 핍박을 대면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 중에 인내하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둘째, 인내는 소망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인간적인 용감함이나 굳센 의지와 진취성에 기반을 두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에 근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의 경험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기술합니다. 그리고 인내를 통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 그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난 속의 인내가 위로와 연결되는 원리는 너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셋째, 인내는 승리를 이룹니다. 신앙 생활은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운동선수로 비유됩니다. 경기에 우승한 자는 상과 그에 따른 영예를 얻는 것처럼, 이와같이 신앙의 승리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 영광을 얻는 승리자는 “시험을 참는자” 혹은 “시련을 견디어 낸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무두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한 사람들이며, 그 모범은 예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넷째, 인내는 열매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 생활에는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씨뿌려진 밭으로 비유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좋은 땅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다섯째, 인내는 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야고보는 인내하는 자는 상을 받는다는 원리를 욥을 예로 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오래참음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입니다. 인내는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특질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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