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징 (Discipline), “회복을 위한 훈육 (訓育)”
플라톤의 친구 크세노폰의 글에는 인간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을 울게 만드는 사람인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아글라이티다스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친구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그들을 울게 만드는 사람보다 그들에게 훨씬 덜 도움이 되는 것같다. 만약 여러분이 이 원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여러분도 역시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는 아들을 울게 함으로써 그의 자제력을 기르고, 교사는 제자들에게 좋은 훈련을 시킴으로 훌륭한 인재를 키우고, 그리고 법 또한 국민을 울게 함으로서 정의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고 우리 마음이 우리의 사적인 사업이나 국정 관리에 더 적합게하 만든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료 인간들에게 정말로 선한 일을 한 사람은 규율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글라이티다스의 견해였습니다.
고대 로마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당연하게 받아 드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로마의 아버지는 법에 따라 가족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의 아들이 결혼한다면, 아버지는 아들의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갓 태어난 아이를 키우거나 버릴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을 묶거나 채찍질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식을 노예로 팔 수도 있고 처형할 권리도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존경 받는 인물이 되고 최고 행정관직을 맡을 수 있는 성품을 갖도록 호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자녀는 엄한 징계를 통해 바로잡았습니다. 그 징계의 과정이 아무리 힘겨워도 자녀들이 인내했던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잘못된 성품이나 죄를 짓는 사람을 징계의 형태를 통해 아름답게 회복시키는 것을 “카타르티제인”이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성경에서 카타르티제인이 사용될 때는 신앙이 잘못된 사람을 교화하여 회복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바로 잡다”로 번역된 카타르티제인은 삶의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들에게 이 말은 “어망을 수선한다”로, 몸을 고치는 의사들에게는 “부러진 뼈를 회복시키다”로, 정치인들에게는 당파로 분열된 상황을 “조정하다”로, 관계가 멀어진 친구 사이에서는 “화해하다”로, 그리고 그릇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교화하다”로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성도를 건강한 신앙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교회서 행하는 권징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 단어를 네 가지 범위에서 사용합니다. 첫째, 이 단어는 “그물을 수선하는” 제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어부로 평생을 살아온 갈릴리의 청년들을 제자로 부를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는 그들이 그 때 배에 있어 “그물을 깁더라”고 설명합니다. 망가진 어망을 수선하는 것은 미래의 사용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이 단어는 사용을 위해 준비된 그릇으로 표현됩니다. 바울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와 반대되는 그릇을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카타르티제인) 진노의 그릇”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신앙에 관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카타르티제인)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온전케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셋째,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어려운 현실을 직면한 성도들에게 이 진리를 이렇게 알립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카타르티제인)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바울도 이 단어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카타르티제인)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넷째, 이 단어는 “완벽하게 결합됨”’을 표현합니다. 이 결합은 부러진 팔다리가 다시 붙었을 때나, 전쟁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도시가 진정되어 고요해진 상태를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몇 몇 사람들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서로 다투며 분쟁할 때, 바울은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을 적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카타르티제인).”
살펴 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권징은 결코 응징이나 보복이나 가학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신은 언제나 건설적입니다. 이 낱말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더 나은 일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만 적용됩니다. 카타르티제인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죄에 사로잡힌 사람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죄에 사로잡힌 성도를 권면할 때는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게 하거나 벌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그 사람이 교회 공동체와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실수와 죄 때문에 움츠렸던 사람에게 격려와 용기를 줘서 사명을 회복시키는 것이 권징의 목적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