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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중대한 임무 수행을 위한 테스트, “수난”

중대한 임무 수행을 위한 테스트, “수난”

 “수난 passion” 혹은 “괴로움 suffering”으로 번역되는 고대 희랍어는 “도키모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낱말은 동사로 사용될 경우 “지켜보다”이고, 형용사로 쓰일 경우 전쟁에서 “테스트 받는”이란 의미가 됩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테스트 받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테스트를 통과해서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가치 있고 사람으로 승인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은 페리클레스입니다. 웅변가였고 정치가였던 그는 또한 장군으로서 여러 큰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사람과 소크라테스가 나눈 대화에 테스트 받는 자는 누구인지를 잘 설명합니다.  

   페리클레스가 장군의 직위를 얻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헤라클레스, 이제 당신이 장군이 되었기에 나의 소망을 말하네. 우리 도시가 전쟁의 예술에서 보다 효과적이고 더욱더 뛰어났으면 좋겠네. 그래서 우리 군대가 적들을 쉽게 격퇴하길 바라네.” 페리클레스는 “나도 어른의 말대로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군인들은 상관들에게 잘 복종하는가? 그들은 궁전의 승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묻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제일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절도 있는 행실과 또한 좋은 규율을 지키고 상관에게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대답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은 사건을 더 명예롭게, 더 법에 따라, 더 존엄하고 정의롭게 판결하고 다른 모든 기능을 잘 수행하는 사람을 그들 앞에 지도자로 세워야 하네”라고 제안합니다. 개인의 생명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군인은 순종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국가가 승인한 사람을 “도키모스”라 불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국가의 큰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 사람을 선별하여 자격 테스트를 했습니다. “도키모스”와 같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온 세계에 정의의 빛을 비추어 세상 끝까지 여호와의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 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름다워라. 기쁜 소식을 가지고 산을 넘어오는 사람이여 . 평화를 선포하며,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선포하는 사람이여 아름다워라.” 이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이들이 받았던 테스트는 고난을 동반한 인내였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충성심에 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테스트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사야 53장은 상세히 기록합니다. 일인칭 “그”로 표현되는 시험자는 곧 테스트 받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으나,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양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정의를 짓밟고 그를 거칠게 끌고 갔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끊어졌다.” 이 수난은 테스트였고, 그 시험보는 장소에 감독관인 여호와가 함께 계셨습니다.결국 시험을 통과하고 사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며,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주었으니.” 처절한 수난의 현장에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 반역하지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고난은 고전 희랍어 “아포도키마조”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앞에서 살펴본 테스트 받는 사람을 뜻하는 “도키모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이 단어를 “패션 Passion”으로 번역합니다. 영어 “Passion”은 의미가 다양하지만, 세 내용이 잘 활용됩니다. 첫째, “deep suffering, 심한 고난” 혹은 “처절한 수난”이고, 두번째, “boundless enthusiasm, 끝없는 열정”입니다. 열정이란 속에서 넘쳐 나는 에너지입니다. 셋째, “ardent love, 불타는 사랑”입니다. 같은 단어가 어떻게 극단적 상반되는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처절한 고난”과 “힘이 넘치는 열정,” 얼마나 어울리지 않습니까? “처절한 아픔”과 “불타는 사랑,”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단어의 출처를 추적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아니 감격하게 됩니다. 

   “도키모스”는 “누군가 개입된 시험” 혹은 “누군가 지켜보는 고난”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받는데, 혼자가 아닙니다. 그 시험의 현장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고통스러운 수난의 현장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된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테스트 중에 있던 “도키모스”는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시니 누가 나와 다툴 수 있겠느냐? 보아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모두 헌 옷처럼 닳아 없어지고, 좀에게 먹히게 될 것이다!” 승리를 향한 열정이 넘쳐 납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수년 전 시카고 농구 팀이 지고 있을 때, 마이클 조던이 경기에 들어 갑니다. 관중석에서 “와–”하고 함성이 터집니다. 그리고 경기에 열기가 오릅니다. 한국 축구 팀이 위기에 몰렸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들어갑니다. “대한민국”이 울려 퍼집니다. 누가 개입하냐는 게임의 판도를 바꿉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한 삶에는 열정이 넘쳐 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이 수난의 예수님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로 대 역전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너진 모든 세계를 새롭게 일으키십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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