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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실패는 과정이지 끝이 아닙니다(출3:1~12)_토론토행복한교회 임철현 목사

실패는 과정이지 끝이 아닙니다(출3:1~12)

토론토행복한교회 임철현 목사

실패, 그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초토화 시키고,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모세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친구처럼 대면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성공적인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도 우리와 같은 실패를 경험했다는 것을 아시나요? 모세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보셨나요? 모세에게도 잃어버린 40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모세는 첫 40년은 왕궁에서 왕자로, 두 번째 40년은 광야에서 잊혀진 자로, 세 번째 40년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속량자로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두 번째 40년은 완전히 암흑과 같은 시기로 성경에서조차 근황을 말해주지 않는 초라한 인생이었습니다. 마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결혼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취업에 실패하고, 부동산에 실패하고, 코인에 실패해서 절망하고 낙담해 앞이 깜깜해진 것과 같은 시간을 모세도 보냈다는 것입니다. 

현실부정, 현실인정, 그리고 포기

 왕궁에서 자란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생각하며 자신이 이스라 엘을 속량할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열정은 민족을 구원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사람 하나 때려 죽이고 끝나게 됩니다. 이집트 사람을 죽인 모세는 바로의 진노를 피해 살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 나왔습니다. 그 시간이 잠시일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이집트에서 꿈꾸던 열정 그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의 계획을 세웁니다. 이집트에서 자기의 능력을 아는 누군가가 찾아와 줄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책을 손에 잡고, 계획도 세우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광야에서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계획을 수정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양치기를 ‘남들보다 경쟁력 있게 더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찾아주는 사람은 없고 알아주는 사람 없이 자신이 잊혀진 사람이 되었음에 대한 현실 자각이 옵니다. 자신 안에 있던 꿈, 야망, 자아 실현이 무너지면서 좌절감을 경험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렇게 모세는 점점 꿈이 죽고, 말이 죽고, 능력이 죽고, 기가 죽으면서 결국엔 ‘양을 이끄는 자’도 아닌, 그냥 다 포기하고 ‘양들을 따라다니는’ 편을 선택합니다. 

‘나는 이제 이방에서 잊혀진 객이 되었구나!’

  십보라와 결혼하고 장인과 가족들의 사랑과 지지를 얻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분명히 가족이 소중하고 힘이 되었지만, 자신의 꿈이 무너진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현실에 그저 끌려갈 뿐,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제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타오르던 불, 야망, 열정이 다 식어 버렸습니다.자신 안에 있는 절망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입을 다물었을 뿐입니다. 말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게르솜이 태어났습니다. 그 이름은 ‘거기에서 객이되다’는 뜻입니다. 잠시 도망친 광야에서 그렇게 오래 살 줄 몰랐는데, 금방 삶이 회복될 줄 알았는데 막막한 그 광야가 모세의 삶의 터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한숨 섞인 푸념을 합니다. ‘나는 이제 이방에서 잊혀진 객이 되었구나!’, ‘이대로 사는 게 이제 내 운명인가 보네. 인물은 무슨 인물.. 그냥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이지..’ 자신에 대한 실망감, 미래에 대한 암담함으로 깊은 절망을 경험합니다. 더 이상 그는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들의 이름처럼 ‘게르솜’일 뿐… 마치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가 “나를 나오미(희락)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괴로움)이라 부르라.”고 했던 모습과 같습니다.  

본질을 일깨우는 불꽃 속으로

  그러던 ‘어느 날’, 모세의 인생에 반전을 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양떼들을 몰고 가다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거기서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경이로운 불꽃으로 모세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모세는 이 경이로운 현상을 이해하고 싶은 ‘더 깊은 관심과 열정’으로 불꽃을 향해 다가갑니다.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This is amzing. Why isn’t that bush burning up? I must go see it. 출3:3)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떨기게 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출3:4) 하나님의 불꽃 앞에서 실패한 자신, 세상의 소리, 불투명한 미래,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만, 그분의 뜻만, 그분의 계획만이 선포되며 선명해 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실패자야! 게르솜아!”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을 모세로 따뜻하게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불꽃 속에서 모세는 ‘모세’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출3:4, 행7:31).

  첫 번째 ‘모세야’는 ‘건짐받은 자(출2:10)’로서의 일깨움을 줍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과거에 나일강에서 건짐받은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의 사내 아이는 나일강에 던져 버리라는 무서운 명령이 떨어졌을 때 태어났습니다. 석 달을 숨겨 봤지만 부모에게 더 이상 길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모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어린 모세도 그저 목놓아 울기만 할 뿐 자신의 상황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건져 주셨습니다. 모세는 건짐받은 사람,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모세야’는 ‘건질 자(속량하는 자, 행7:35)’로서의 계시적 부르심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가시나무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행7:35) 실패자였던 모세(the same man)를 ‘속량하는 자’로 바꾸셨습니다. 속량한다는 것은 ‘값을 주고 산다’, ‘건져낸다’, ‘구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전에는 실패자였던 사람이 속량하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 속으로

  광야에서 늘 바라보던 흔해빠진  떨기나무가 모세에게 의미를 주었습니다. 그 불꽃 속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세는 자신의 본질이 속량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삶에도 동일한 일이 벌어집니다. 피 묻은 십자가의 불꽃 속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좌절하고 낙망해서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린 순간, 늘 바라보던 흔해빠진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실패자로, 죄인으로 낙인찍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주십니다. 그냥 내 모습 그대로, 그분의 자녀로 부르십니다. 우리의 본질을 깨워 내십니다. 그 거친 십자가에,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아 죽은 줄 알았던 그 예수가 실은 나의 저주를 위해 죽으시면서 나를 그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패와 절망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마른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그런데도 실패감에 찌든 모세에게는 안 될 이유가 너무 많았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고 대답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라고 말하라 하시면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믿음을 주기 위해 지팡이 뱀이 되게, 손에 문둥병이 생겼다 사라지게 하는 기적을 통해 말하라 하면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입을 지었느냐?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말하리라.”하시면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거절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마른 막대기’로 보고 안 된다고, 못 한다고 합니다. 모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안될 이유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꿈도 잃었고, 열정도 잃었고, 지도력도 잃었고, 말도 못하고.. 우리에게도 인생이 안 될 수 밖에 없는 많은 이유와 핑계가 존재합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공부를 못해서, 가방 끈이 짧아서,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서, 능력이 없어서, 이미 여러 번 실패를 해서, 인물이 아니라서.. 우리 자신을 마른 막대기처럼 봅니다. 우리 자신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와 같은 자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하십니다. 모세가 들고 있던 목자의 지팡이, 던지면 뱀이 되었던 지팡이를 하나님이 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팡이로 사용하십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4:17)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4:20)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4)고 하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God answered, “I will be with you.” 출3:12)고 하십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슈가 우리 자신에게 있으면 우리는 해낼 수 없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던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능력 주시는 분이 함께 한다면 우리에게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하나님의 불꽃을 만나기 전까지 모세는 스스로 게르솜의 삶을 끝낼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불꽃, 하나님의 음성, 그분의 계획만이 게르솜의 상태에서 모세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떠한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최선을 끌어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 모든 것을 그분의 뜻대로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 함께 하시면서 말과 행할 일을 지도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실패한 우리를 세상을 구원하는 속량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실패하셨나요? 낙망이 됩니까? 절망스럽습니까? 실패는 과정이지 끝이 아닙니다. 실패와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는 법은 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 사랑으로 증명하신 그 사랑의 불꽃을 향해 걸어가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임마누엘의 은혜로 나와 함께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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