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약은 계약을 넘는다(누가복음 19:11-27 )
하늘향한교회 신윤희 목사
오늘 본문은 열므나 비유이다.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열 명의 종에게 한 므나씩 준 주인이 나오는 비유다. 한 므나는 백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다. 한 천만원 정도라고 할 때 주인은 한 1억을 가지고 종들에게 천만원씩 준 것이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라고 하고 먼 나라로 떠난다. 시간이 어느 정도 많이 흘러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인이 돌아와서는 이제 그 종들을 소집한다. 각각 얼마를 벌었는지에 대하여 점검한다. 첫 번째 종이 받은 한 므나로 열므나를 남겼다고 하여 칭찬을 듣는다. 두 번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하여 칭찬을 받았다. 이제 세 번째 종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잘 보관해 두었다고 하니 이번에는 주인이 악한 종이라고 평가한다.
보통 열므나 비유가 주는 교훈이 뭐냐고 한다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실 이 열므나 비유를 깊이 묵상하면 그런 차원을 뛰어넘는 메시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목적은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다시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나는 잃어버린 그 한 영혼에게 내 마음이 가있는데 너희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 주인은 종들과 계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약을 한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에서 결혼계약을 하지 않고, 결혼서약을 한다. 이는 상대에 대해서 계약서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약을 통해 상대방을 온전히 사랑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이고 다짐인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면 비유에서 주인이 결과물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9장 16절에 보니까 첫 번째 종이 이렇게 말한다.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므나를 남겼나이다.” 그랬더니 주인의 평가를 잘 보면 17절에,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한다.
보통 주인의 칭찬하면서 그 초점이 “와우, 10개나 남겼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충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결과물로 평가하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케네스 베일리가 쓴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라는 책에서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에 대해 이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거래를 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즉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셨다는 것이다. 만일 주인이 자기 종들이 장사하여 무엇을 벌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종들에게 “번 돈을 내게 보여봐라”라고 이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이 “너희가 얼마나 많은 거래를 했느냐?”라고 묻는다면 이는 종들이 주인이 자리를 비운 위험한 시기에도 주인에게 어떻게 공개적으로 충성했는지를 밝힐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서약은 계약을 넘는다”라고 정했다. 서약과 계약은 분명히 다르다. 계약서는 contract에 있는 것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서약은 다르다. 다시 묻는다. 결혼은 계약이라고 하는가? 서약이라고 하는가? 결혼이 서약인가, 계약인가?
사실 계약이라는 것이 더 강제성이 있고, 법적 효력이 있다. 그러나 서약(誓約)은 무엇을 반드시 하겠다고 다짐이며 맹세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집을 계약했다면 계약 조건이 생긴다. ‘무엇을 무엇을 언제까지 해야 한다.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문제가 된다. 잔금을 언제까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로계약을 했다고 하면, 내가 일한 댓가로 시간당 얼마를 받는다면 그 일하는 시간 동안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근로계약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서로 맞았을 때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이다. 계약은 상대방이 계약을 파기하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코카콜라는 2002년 FIFA 한일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호나우지뉴와 광고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2012년 기자회견 중 무심코 탁자 위에 놓여있던 펩시콜라를 마셨다가 계약파기가 되었다.한 순간의 실수로 브라질 축구스타는 100만 파운드(약 18억원) 후원 계약이 끊긴 것이다.
오늘 본문 14절에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 예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에 대하여 방해하고 훼방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이 하게 될 그 일들이 참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암시하는 내용 이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시는 주님이라는 걸 강조한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성도 여러분이 생각났다. 지난 주 있었던 야외수련회에서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그 어려움을 뚫어내셨다.
자녀가 아픈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여하려고 애쓰신 분도 있다. 수련회 참여하려고 다른 날 미리 근무하시고 시간을 조정하셔서 오신 분도 있다. 근무시간 조정을 해보려고 무진장 노력하시다가 안되셔서 많이 안타까워하시는 분도 있었다.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통해 성장하고, 성도들을 통해 성숙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냥 두면, 더 편리하고 수월하고, 딱히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약한 사람이 아니라 그 계약을 넘어서는 사랑의 서약을 한 사람들의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이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종은 왜 책망을 받았을까? 22절에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라고 하신다. 자세히 보면, 세 번째 종에 대한 평가는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지금 주인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주인을 너무나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다. 착취하는 못된 주인이기에 열심히 해봐야 소용없다는 뜻이다.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남기면 그것을 주인이 다 빼앗아가 버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열심히 하다가 잘 안 되고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종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종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가? 케네스 베일리는 “그 종이 주인을 뒤틀어 지게 보게 된 것은 자신의 신실치 않음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본인이 신실치 않음을 주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모든 문제의 근원임을 우리가 자각해야 된다.
코로나 19 팬데믹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우리가 혹시 이 세 번째 종과 같지 않은 지 돌아보아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고, 하나님은 다 착취하시고, 잘되면 다 빼앗아가고, 안되면 다 뒤집어 씌우시는 분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제가 아는 분이 젊었을 때 자신의 자녀가 장애를 갖고 태어나니, 자신의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교회도, 목사도, 하나님도 다 하찮게 보이더라고 하셨다. 사단은 우리를 어떻게 든지 하나님과의 서약의 관계가 되지 않도록 권모술수를 다 사용하여 대적한다.
우리들에게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또 다른 미션을 주신다는 점이다. 17절에,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이 그저 수고한 종들에 대한 보상만이 아니었다. 두 종에게 준 보상은 특혜가 아니라 더 큰 책임이었다. 첫 번째 종은 열 고을을, 두 번째 종은 다섯 고을을 다스릴 책임을 받은 것이다.
자격이 없는데도 충성되다고 인정해 주시고 책임을 맡겨주시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계약이 더 편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관계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계약조건 이행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이렇게 해준다는 계약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계약관계로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서약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서약은 계약을 넘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계약한 관계가 아니라 서약한 관계다.
계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맹세로 말미암은 서약이 우리의 행동의 이유와 근거가 되기를 소망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신윤희 목사(하늘향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