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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영광을 보고 믿더라(요한복음 2장 1-11절)_김경웅 목사(오타와한인장로교회)

영광을 보고 믿더라(요한복음 2장 1-11절)

김경웅 목사(오타와한인장로교회)

우리가 잘 아는 본문입니다. 어떤 시인은 오늘 본문을 노래하기를 “물이 그녀의 창조주를 만나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라고 했습니다. 참 시적인 표현이죠? 오늘 본문을 조금은 낯설게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갈릴리 가나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3-4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일반 성인의 걸음걸이로 1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가나에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거기 계셨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초청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두 문장의 뉘앙스가 다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는 혼인 잔치와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으로 그 혼인 잔치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부엌에서 일을 하시거나, 음식을 준비하시든지, 뭔가 이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진행되는 어떤 부분과 연관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초청을 받았습니다. 혼인 잔치의 하객으로 계시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 잔치가 진행되고,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더 빨리 알아차리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흥미로운 것은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이제부터는 너의 어머니다”라고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에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며, “너희들 그분이 누구인지 다 알지?”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혼인 잔치에 관련된 분으로 현장에 계셨다면, 아마도 부엌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가기 시작할 때, 웅성거리는 그 상황, 그 중심에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하객들에게는 티다 나지 않게, 하지만 음식을 준비하고 잔치를 섬기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긴박한 위기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도주가 더 이상 남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잔치에 기쁨이 떨어졌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상황이 아니라, 포도주가 다 덜어진 상황 속에서 등장하셨다고 말합니다. 위기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예측이 아니라, 위기가 발생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더 이상 하객들에게 내어 줄 포도주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 당시의 유대 문화 속에서 일반적인 혼인 잔치는 7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혼인 잔치를 7일 동안 하는데 혼인 잔치의 메인 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저는 전라도 사람이니까, 다 아시죠? 전라도에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준비할 때, 제일 먼저 연락해서, 꼭 준비해야 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시잖아요?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에 꼭 있어야 하는 음식, 핵심이 되는 것은 포도주였습니다. 혼인 잔치의 핵심은 축하와 기쁨이고,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포도주가 식탁에 올려져야 했습니다. 기쁨이 있는 행사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독일의 맥주처럼, 마실 물이 귀한 곳에서 정제되어진 음료, 쉽게 마실 수 있으면서도 안전한 물, 그것이 포도주인 것이죠.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선배들의 술자리에 불려 가거나, 대학 동기들의 모임에 참여할 때면, “안주만 축내는 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안주만 축내는 놈이라는 말 속에는 “비싼 안주만 먹는다”는 비난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왜 여기에 모인 줄 알아? 안주를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러 왔다. 주된 것인 무엇인지 알지? 그러면 술을 마셔야지!” 라고 말하는 것이죠.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 잔치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기쁨이 있는 행사가 끝난 상태인 것입니다. 

허들을 놓으시는 예수님

아직은 하객들은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을 모를 수 있지요. 그 하객들 중에 누구라도 “포도주를 더 가져오시오”라고 외치는 순간, 아니면 연회장이 하인 중 하나에게 “저쪽 테이블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 보이는데, 더 갖다 주어라”라고 말하는 순간, 잔치가 끝났다는 것이 발각되는 위급한 상황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오셔서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잔치가 끝나버렸다. 하지만, 뭐라도 해서 이 잔치의 기쁨이 지속될 수 있도록. 뭐라도 좀 해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어머니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싸늘하죠? 우리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대답하실 때, 어떻게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기도 하고,  목사님들은 “이 여자라는 표현은 고귀한 여인을 부르는 극존칭, 사랑하는 여인을 부르는 호칭이다”라고 설명하지만, 요한은 특별히 이 호칭을 문제로 삼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고, 결혼 잔치에 기쁨이 사라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예수님은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려고 하는 것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살펴보면, 이 표적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항상 상대방에게 장애물을 하나 주고 있습니다. 오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 앞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장애물 하나를 세우시는 거죠. 오병이어로 남성만 5000명을 먹이는 표적을 행하기 전에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장애물을 놓으십니다. 요한은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빌립을 테스트했다라고 분명하게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헤롯 왕의 고위급 신하가 죽어가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예수님께 나와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요청했을 때라든지,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멈춤의 순간을 갖게 합니다. 마치, 나무의 결을 따라 손을 움직이다가, 손바닥에 가시가 박히는 통증에, “아야”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멈칫”거리게 하시는 거지요. 그리고, 그 장애물을 넘어서 계속 나무를 만지고, 나뭇결을 따라 움직이는 선택, 믿음의 선택을 요구하시는 것이죠.

허들을 훌쩍 뛰어 넘는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어머니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돈 케어’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마치 ‘그럴 줄 알았지’라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데리고 갔던 주변의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하든지 그대로 해라”는 말을 하고 퇴장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의 끝을 아니까 괜찮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잔치는 이제 끝났어. 너희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라고 말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반응할리가 없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어머니 앞에 허들 하나를 놓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 허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훌쩍 뛰어 넘어 버리는 것이죠. 혼인하는 커플을 축하하기 위해 하객으로 오신 그분이 혼인 잔치의 기쁨이 여기서 끝나게 내버려 두실리가 없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뭔지 모르는 찌르르하는 안좋은 느낌이 있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죽이겠다는 선포를 무시하지요?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아 풀무들로 내던져지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의 고백을 기억하시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이 풀무불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을 섬기지 않고,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고백하는 부분에 우리 손바닥에 가시가 박히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이 적용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믿음의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을 훌쩍 뛰어 넘어 버립니다.

물을 채워 나르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퇴장하고, 요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두세 통의 물이 들어가는 항아리의 사이즈는 나중에 구글 선생님에게 물어보세요. 대략 큰 생수통 18리터의 생수통이 60여개 정도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6개. 뭔가 많은데,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죠? 7개의 돌항아리였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함께 요한복음을 살피면서 그 의미를 찾아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6개의 돌항아리 가득 물을 담게 하시고, 그 물을 퍼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돌항아리에서 연회장에게 가는 물은 바가지가 아니라, 포도주를 담던 병, 혹은 주전자처럼 안이 감춰진 용기였을 것이고, 그 용기에 담겨졌던 물이 포도주 컵에 따라졌을 때는 최상급의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연회장의 감탄과 함께, 더 많은 기쁨이 넘치는 혼인 잔치가 됩니다.

오늘 이야기 속의 최대의 수혜자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 “그분은 능력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삼 속에 있는 여러 문제를 바꾸시고, 해결해 주신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 오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오셔서 우리의 삶에 떨어져 버린 잔치의 필수물이었던 포도주를 공급해 주시기 위해, 우리 삶 속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 혹은 바꾸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고백할 때,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이야기를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려면,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은혜를 받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수혜자들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의 능력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혼인 잔치에 참여한 하객이라고 하는 오늘 이야기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무명의 다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십니까?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이 바뀐 최상급의 포도주를 즐긴 사람들, 예수님의 기적에 유익을 얻은 사람들이 오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혼인 잔치에 참석한 하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 내 삶에 오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꿔 주십시요”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오늘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속에서 하객이라는 포지션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하객에게 스팟 라이트를 비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객들이 그 잔치를 더욱 축하하고 즐거워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객에게 방점을 찍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김혜수 배우처럼, 주인공일 때도 탁월하지만, 단역이나 조연으로 연기할 때도 주연을 능가하는 카리스마 있는 존재인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예수님 앞에 나타나 자신의 역할을 하고 퇴장했지만, 오늘 기적의 시발점이 된 것처럼, 다른 이들의 삶에 부족한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중보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믿음과 삶에 적용해 봅시다. 

문제는 예수님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 적용되는 대상이 우리가 아니라, 다른 누구, 즉 우리가 중보하는 다른 사람의 삶에서 경험되는 기적이 되다는 거죠. 내 중보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거죠. 내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삶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나랑은 직접 상관이 없지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중보기도하는 마음을 주셨고, 기도했고, 그 응답을 경험하지만, 여전해 내 인생의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종들에게로 옮겨 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 될 수는 없으니, 종들의 순종에서 우리의 적용점을 찾으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이 변화된 포도주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하인으로 혼인 잔치 속에 있고, 그 잔치가 끝날 때까지, 테이블에 음식과 포도주를 공급하고, 오가 가는 하객들을 안내하고, 수고 합니다. 물론 일하는 중에 잠깐 잠깐 음식을 집어 먹고, 허기를 채울 수는 있지만, 변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버려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순종한 종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때, 오늘 이야기 속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이 되어 버립니다. 주인의 혼인 잔치를 최선으로 섬기고, 수 많은 음식과 그 질 좋은 포도주를 계속 나르지만, 그 음식 먹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려고 할 때, 혼인잔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포지션을 설정해야 하는데, 어디에 우리의 포지션을 둘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야기를 들려주는 요한은 우리에게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키워드: 표적, 영광, 믿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힌트는 오늘 이야기의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첫 번째 힌트는 요한이 늘의 이야기를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표적은 싸인 즉 표지판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실 때, 교회 표지판을 보셨지요? 그 표지판을 교회라고 여기는 분은 안계시죠? 교회 표지판은 교회가 있다고 말하는 사인일 뿐입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에 오셨고, 예배당으로 들어오셔서 저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계시지요? 표지판은 목적지가 아니지요? 이 표지판을 따라가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거야 라고 말하는 상징이지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셔서 혼인잔치를 축복하셨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이 기적은 표지판이야. 이 표지판을 따라, 표지판이 가리키는 것을 따라 가면, 너희들이 도착하게 되는 종착점이 있을꺼야. 그것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그 기적을 행한 예수님 그 자신을 만나는 것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이라는 단어 다음에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영광은 doing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Being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유소나 컨비니언스 스토어에 들어가 다양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깔의 음료들로 가득 찬 냉장고 앞에 서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진열된 음료수들은 각각 자신의 영광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광은 우리의 얼굴을 통해 표현된다고 하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제 얼굴에서 저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혼과 내면, 전인적인 인간 김경웅이 여러분 앞에 보이는 육체로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제 얼굴을 보면서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의 존재를 인식할 뿐 아니라,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목사인지를 보고 계십니다. 제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저 김목사는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야,” “성경을 잘 가르치지,” “노래는 잘 못하는 걸”이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저를 영화롭게 합니다. 이때는 저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저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나 성품,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G

“인간의 첫째된 분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 하는 것”이라는 웨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첫번째 항목을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다양한 음료수로 가득 찬 냉장고 앞에 서 있습니다. 다양한 병과 캔들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 콜라나 어떤 음료수를 꺼내어 손에 들었습니다. 이것이 영화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여러 음료들 중에 그것을 선택하여, 내 손에 콜라 캔을 들 때, 내 손의 콜라 캔은 냉장고 안의 모든 음료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우리는 손에 든 콜라를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콜라 캔의 뚜껑을 따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보고,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연속되는 동작입니다. 표적이 예수님의 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음의 연속 동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드러냈습니다. 요한복음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백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구체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예수님이 특별하신 분이심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신 순간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물이 포도주로 바뀐 이야기 속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물이 포도주로 바뀐 기적이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신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기쁨이 지속되게 하시고, 더 큰 기쁨으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창조주를 만난 물이 부끄러워했던 것입니다. 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내십니다. 저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표현보다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창조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태초에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명예와 수치, 군림이나 비굴,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좀 더 나은, 좀 더 성숙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섬기는 분으로 우리 중에 계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또한 섬기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행동하는 주역인 하인들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섬김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이 만물을 위해 섬기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섬김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그 섬김을 번개처럼, 천둥처럼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처럼,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소개팅을 하고, 데이트를 시작한 한 커플이 상대를 향해 “너 나 믿어?”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유혹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동안 나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성품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내 영광을 봤지? 나는 이미 내 마음을 너에게 간걸 알지? 제 너의 마음을, 너의 미래를 나에게 줄 수 있어?” 마치 친구의 결혼식에 간 커플이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손을 꼭 잡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예표처럼, 자신들의 결혼식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나는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기 위해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는 물의 주인입니다. 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는 포도주의 주인이십니다.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 중에서 사신 분입니다. 결혼식에 기쁨이 넘치고, 그 잔치가 지속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 그 분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내 삶 속에 예수께서 계실 때, 그의 영광이 나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나에게, 이 기쁨이 없다면, 제일 먼저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 대해 고백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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