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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_캘거리 초대교회 이현구 목사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캘거리 초대교회 이현구 목사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제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때면 잘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뉴욕의 어느 지하철에서 어린 아이가 막 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고작 5살 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그 아이는 신발을 신은 채로 좌석 위로 올라가 뛰거나 앉아 있는 승객들을 툭툭 치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신문을 읽고 있던 사람의 신문을 확 낚아채거나 서 있는 사람들의 발을 차기도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일제히 한쪽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아주 못 마땅한 얼굴로 한 마디씩 하였습니다. 

‘아니, 저 아이의 아빠는 왜 아이를 제지하지 않고 저렇게 멍하니 앉아 있지? 아이가 이렇게 망나니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건가? 아니, 아이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이 불편하고 힘들어 하는 게 안 보이나?’ 하면서 수군거리고 있을 때, 마침 어떤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그 남자에게 큰 소리로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아니, 여보슈. 저 아이가 당신 아이가 아닙니까? 아이가 저렇게 돌아다니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데 왜 당신은 아이를 제지하지 않는 거요?’ 

그러자 남자가 가만히 고개를 들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잠시 전에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장례를 치룰 준비를 하러 집으로 가는 길인데 제 어린 아들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설명해야 할지, 또 제가 앞으로 아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너무도 막막해서 힘이 하나도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승객들은 다들 당황해 하며 말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괜찮습니다. 아이는 우리가 잘 돌봐 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서 각자 아이에게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과자, 사탕, 초콜렛 등을 주며 아이를 진정시키고 때론 아이를 안아 주기도 하면서 어느 누구도 그 아이로 인해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남자와 아이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아이와 아빠에 대한 긍휼의 마음,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속담에 “누군가를 평가하려면 그 사람이 신었던 신발을 신어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 봐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삶의 입장에 서 보지 않으면 우리는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쉽게 비판하는 것은 사실 내가 포용과 관용이 부족한 사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인 것입니다. 영어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마 다들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Judging a person does not define who they are…

It defines who you are.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은 그가 누구인지를 정의하지 않는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정의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이런 실수와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내 판단과 내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보다는 내 생각이 앞서는 때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잘못과 실수를 참 많이 했습니다. 내 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은 실수를 합니다.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운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면에서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살아가다 보면 내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7장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For in the same way you judge others, you will be judged, an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가 제자들과 수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이렇게 세 장을 묶어서 부르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본이자 태도이고 자세이며 실천 사항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세 장에 걸쳐 아주 자세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마태복음 5,6,7장을 매일 묵상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 산상수훈을 읽게 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나누고 말씀대로 실천해 보도록 권고하고 서로서로 점검해 보며 살아간다면 다른 어느 교육보다도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앞으로 이 산상수훈에 대해 자주 설교할 생각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체득이 되고 경험이 되고 실천적 말씀이 되도록 노력하고 애를 쓰는 삶의 모습이 되기를 정말 바라고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핵심 중에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번 더 본문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서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토라, 즉 모세 오경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모세 이후에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셨고 기록하게 하셨던 율법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신약이 쓰여지지 않았던 때이고, 구약의 연장에서 신약의 시대가 열리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고 있던 구약의 하나님 말씀 전체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슨 심오한 사상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이라니 정말 이렇게 심플한 해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모두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황금처럼 고귀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 이전의 사상가들도 이런 숭고한 가르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이 말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 이전 세대에 가장 존경 받던 랍비인 힐렐은 ‘그대에게 싫은 것은 이웃에게 하지 말라. 그것이 모든 율법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것의 주석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도 ‘내가 원치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부정적인 개념을 긍정적으로 바꾸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13개 조항으로 세분해서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 248조항금지해야 하는 것 365개 조항을 가지고 더 중요한 율법은 무엇이고, 덜 중요한 율법은 무엇인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율법의 조항들을 단 한 마디로 집약하여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와 태도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보다 권위 있는 선언이 어디에 있습니까? 더구나 이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무슨 영적인 심오한 말씀이 아닌 것 같아 좀 이상합니다. 혹시 좀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요? 이게 무슨 산상수훈의 결론이라고 말 할 수 있나요? 에이, 아닌 것 같은데요’ 하고 말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것은 저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에 나온 대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오래 전 어느 분이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기에 아르바이트로 겨우 등록금만 내고 굶지 않을 만큼 먹고 사는 그야말로 가난한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러 학교에 가면 점심 시간 때 빵 한 조각도 못 먹고 물로 배를 채우고 벤치에 누워 허기를 달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서로 인사만 하고 지내던 교무처에 근무하는 한 남자 직원이 벤치에 누워 있던 자신을 찾아 와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얼굴과 말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휴, 나는 이 샌드위치가 정말 싫은데 왜 아내는 맨날 이것만 싸 주는지 모르겠어. 아, 정말 싫어. 그렇다고 안 먹고 버리기에는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먹자니 먹기 싫고 참 처치 곤란이야. 그렇다고 샌드위치를 안 먹고 그냥 가져가면 아내가 난리를 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난감해 미칠 것만 같아. 아, 그런데 자네 혹시 샌드위치 싫어하지 않으면 이것 좀 대신 먹어 줄 수 있겠나? 그럼 너무 좋을 텐데. 정말 고마울 것 같아.’ 그러자 이 유학생은 ‘그래요? 그럼 그 샌드위치 나에게 주세요. 내가 대신 처리해 드릴께요’ 하고 받아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직원이 얘기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샌드위치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네. 그러면 자네가 앞으로 내가 싸 오는 샌드위치를 매일 먹어주면 어떻겠나? 그러면 나는 아내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아. 어때, 그렇게 해 주겠나? 나 좀 도와주게’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유학생은 덕분에 점심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고 공부를 잘 마치고 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국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직원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내도 없는 싱글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가난한 유학생이 점심을 굶고 있던 것을 몇 번 목격한 직원이 유학생을 돕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유학생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돕기 위해 없는 아내를 핑계 대며 샌드위치를 만들어 공급했던 것입니다. 그 유학생은 한국에 들어 와 마침내 교수가 되었고, 그때 그가 직원에게 배우고 대접을 받은 대로 자신도 학교에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 직원은 성경의 말씀을 따라 자신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그로 인해 또 다른 말씀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선한 영향력이란 바로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의와 나의 착함과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말씀이 갖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고, 순종하고, 따르고,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는 ‘대우를 받고자 하는 대로’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습니다. 대우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로  ‘존중(respect)’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존중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 준다는 말입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신앙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를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이런 찬양을 자주 불러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50년 동안의 신앙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50년의 신앙 생활을 통틀어 이 찬양만큼 값진 찬양은 없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찬양이란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그분의 이름을 칭송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나누는 믿음의 고백 중 이 찬양은 백미 중에 백미, best of best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찬양입니다. 같이 한번 불러 볼까요?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형제와 자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함부로 대하고, 멸시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왕따를 시키고,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사랑하는 눈빛으로 대하고, 따뜻한 미소와 얼굴 표정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서로간의 관계입니다. 그런 가정과 교회,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2023년 음력으로 새해가 되는 설날입니다. 우리 한국의 고유의 명절을 맞으면서 그저 세배하고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선대하고 대접하기를 다시 한번 결심하고 마음에 다짐하는 그런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쉽지 않은 결심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한 걸음 내딛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그 사람이 때로는 아주 나쁜 사람처럼 보여도, 아무리 큰 잘못을 하였어도, 내가 싫은 사람이어도, 나와 달라도 너무나 많이 달라서 갈등을 겪는 사람일지라도 그럼에도 인격적인 존중을 해 주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내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하였거나, 우습게 보았거나,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다면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대상이 가족이었든 이웃이었든 그 누구였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태도를 고치고 새로운 모습, 새로운 태도와 자세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원천은 바로 회개에 있습니다. 진솔하게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과 노력만으로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런 겸손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그렇게 겸손하게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 힘쓰는 여정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23년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내 생각을 내려 놓고 내 가족, 내 이웃을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존중하고, 선으로 대접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하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길을 좇아 따라가는 제자가 가야 할 길이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외형만 믿는 사람일 뿐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저 종교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현대판 바리새인과 별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그런 삶에서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저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런 태도와 자세에서 떠나고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2023년은 그런 태도와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앙의 여정을 걷는 변화의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2023년에는 그런 영적 성장을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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