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본것같은 성지순례] 쿰란(Qumran)

쿰란(Qumran)

예루살렘에서 차로 한 시간 달리면 사해바다 1.5km 북서쪽으로 쿰란 국립공원이 있다.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두루마리 구약성경 사본이 발견된 장소이다. 1946년 겨울 어느 날 탐라(Ta’amra) 베두인족의 모하메드 아부 디엡과 그의 친구는 사해 북서쪽의 언덕 유대광야에서 양과 염소들을 치다가 잃어버린 가축 한 마리를 찾아 어느 한 동굴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 동굴은 반쯤 다른 돌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작은 돌을 하나 집어 그 안에 던졌는데, 안에서 빈 항아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던 것이다.

동굴 안에는 긴 원통형 항아리가 줄지어 있었는데, 그 중 한 항아리 안에서 이사야서, 하박국 주석서 그리고 공동체 규율집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천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은 듯, 잠자고 있던 성경 사해사본들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온전한 이사야서와 20세기 최고 성서 고고학의 발견물인 사해사본들이 발견되었다. 베두인 목자들은 두루마리 성경의 재료였던 동물 가죽이 샌달의 가죽끈을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베들레헴의 구두상이자 골동품 상인인 칸도(Kando)에게로 가지고 갔다. 그는 베두인들에게 이 가죽들은 고대 성경문서이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칸도는 모하메드와 몇 명의 비즈니스맨들과 함께 그 두루마리 성경이 발견된 동굴로 향했다.  그 곳에서 전쟁문서, 시편, 이사야 B, 그리고 창세기 외경이 따로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의 시리아 대주교 사무엘은 세개의 문서를 칸도의 중재 하에 베두인들로부터100달러에 구매했고, 그 사실은 곧 히브리대 교수 수케닉에게도 전해졌다. 수케닉은 베들레헴에서 전쟁문서와 시편의 말씀을 구매한 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그 문서의 중요성을 즉시 알아차렸으며, 그 고대 문서들은 에센에파(The Essene) 도서관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1948년 5월 14일 이후, 사해 인근과 동예루살렘 베들레헴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있었고, 1948년 겨울 이후 70개의 고대 성경사본과 문서들이 대거 발견되기 시작했다.

베두인들과 고고학자들은 경쟁적으로 고대 문서들이 숨겨져 있는 동굴들을 찾아 나섰다. 1952년 쿰란 주변의 230개의 동굴들이 고고학 팀들에 의해서 탐사되었고, 3번 동굴에서 발견된 구리사본(copper’s scroll)은 현재 요르단의 암만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사본의 내용에는 금과 은을 숨겨둔 63개의 장소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4번동굴에서는 600개의 성경사본으로부터 분리된 15,000개의 문서조각들이 발견되었다. 1953년에는 11번 동굴에서 아람어로 쓰여진 욥기서와 8 미터에 달하는 성전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1954년 수케닉 박사의 아들 이갈야딘은 해외로 반출된 성경사본들을 이스라엘 기관의 도움으로 구입했고,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의 ‘사해사본 전당’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문서들은 2천년의 시간 동안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서 바래지기도 했지만, 사본을 발견한 베두인들이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인위적으로 사해사본을 찢어 조각으로 만든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1946년부터 1956년 사이에 11개의 동굴에서 사해 문서가 더 발견되었고, 2017년에도 12번째 동굴이 발견되기도 했다.

 쿰란은 예루살렘에서 25km 동쪽, 여리고에서는 10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였고, 기원전 2세기에 새로운 정착민들이 터를 잡았다. 기원전 31년 지진에 의해 이 지역은 파괴되고, 그 후 로마가 점령하기 전, 서기 68년까지 이곳에 공동체가 존재했었다.  쿰란 국립공원에 순례자들이 도착하면 먼저 7분 정도 그 공동체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된다.  이들은 하루에 두 번 공동체 식사를 하는데, 식사하기 전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정결례(ritual bath)를 행하고 하루 세 번 기도를 했으며, 공동으로 일하고 저녁마다 모여서 제사장이 불러주는 설교를 받아 적었다.  이 내용은 쿰란 1번 동굴에서 발견된 야하드 공동체의 규율집(1QS)의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기원전 2세기 하스모니안 왕조가 세워지면서 예루살렘을 떠난 종교 공동체였던 것 같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3대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희생을 드리는 행사에 참여했지만,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않고 이곳 황량한 유대광야에 정착해서 그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사독가문이 아닌 모딘의 제사장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되고, 유대지파 출신이 아닌 하스모니아 왕가가 통치하면서 일부 종교심이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 타락한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왜 광야로 갔을까?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이다. 이 단어의 어근인 드바르(דְבָּר)는 “말씀, 계명”이라는 뜻이고, 접두사인 미(מ )는 “어디로부터”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광야’는 “말씀으로부터”란 의미가 있다. 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것처럼, 여호수아가 광야 길에서 요단강 물을 멈추고 마른 땅을 건넌 것처럼, 엘리야가 브엘쉐바 네게브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새로운 힘을 얻었던 것처럼,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광야에서 받았던 것처럼, 유대 전통을 따라 광야로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말씀을 맡은 자로서 기도에 힘쓰고 정결함을 최고 우선 순위로 두어서 말씀에 집중했으며, 그들이 남긴 성경과 문서들은 2천년이 지난 후대에 전해져 예수님 당시의 종교인들의 신앙생활의 모습과 성경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글, 사진_ 이호일 목사

Advertismentspot_img
- Advertisment -

최신 칼럼

인기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