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진영이 주장하는 이상한(?) 삼위일체(4)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박진영은 이 선언을 독특하게 해석한다. 성경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아니라 성부, 곧 야훼만이 유일하신 최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소박한 해석처럼 보인다. 실제로 삼위일체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성도라면 품기 쉬운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빠져 있다. 특정 본문에서 ‘하나님’이 성부를 가리킨다는 사실과, 성부만 하나님이고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성부를 ‘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성경의 표현은 성자와 성령을 신성에서 제외하라는 뜻일까?
첫째, 성경의 ‘한 하나님’ 고백은 성자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성자를 증언한다. 신명기 6장 4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는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고백이다. 이 고백을 배경으로 고린도전서 8장 6절을 읽어 보자.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바울은 ‘한 하나님’을 성부께, ‘한 주’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지 않는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한 주로 고백된다. 바울은 예수님을 유일신 고백 바깥에 또 하나의 신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고백 안에서 성자의 주 되심과 창조 사역을 증언한다. 에베소서 4장 4-6절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성령도 한 분”, “주도 한 분”, “하나님도 한 분”이라는 고백이 나란히 나온다. 만약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는 말씀이 성자를 신성에서 제외한다는 뜻이라면, 같은 논리로 “주도 한 분”이라는 말씀은 성부를 주 되심에서 제외한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 성부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성자가 하나님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며, 성자를 주라고 부른다고 성부가 주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둘째, ‘하나님’이라는 신적 명칭과 ‘여호와’라는 언약적 이름을 성부 한 위격에게만 배타적으로 제한할 수 없다. 이사야 45장은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5절)고 선언하는 강력한 유일신 본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장의 23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는 말씀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0-11절에서 예수님께 적용한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유일하신 여호와께 돌리는 경배가 예수님께 돌려진다. 그런데 이 경배는 성부의 영광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성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 성자는 성부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어떤 문맥에서 성부를 특별히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가? 칼빈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특정 위격을 구별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성부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포함하지만, 성부와 성자가 함께 언급되는 관계적 문맥에서는 위격적 질서에 따라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성부만이 참되고 고유하게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기독교강요』 1.13.20, 23-24). 성부가 어떤 문맥에서 ‘한 하나님’으로 특별히 지칭되는 것은 신성을 독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 사이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와 질서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을 고백하는 데 있지 않다. 성부의 높으심을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낮추는 근거로 사용하는 데 있다. 성부만을 ‘최고 하나님’으로 한정하고 성자를 그 아래에 놓는다면, 위격적 질서를 신성의 등급과 존재론적 서열로 바꾸는 셈이다.
셋째, 이 오해는 이단을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 이단 대처 사역 현장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예장 통합 총회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미주 세이연 측은 예수님과 성령은 하나님이시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했기에,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고백하면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무너뜨리는 양태론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제106회 총회(2021)가 채택한 이 보고서는 그러한 주장이 구약의 여호와 본문을 성자에게 적용하는 신약의 증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정통신학과 상당히 다르다고 판단했다. 양태론을 경계하려는 문제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면 정통 삼위일체론의 다른 한 축을 훼손할 수 있다. 칼빈은 성자께서 신성에 관해서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며,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부에게서 나신 아들이심을 분명히 한다(『기독교강요』 1.13.25). 따라서 “예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고백과 “예수님은 성부와 동일한 위격이시다”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성자의 온전한 신성을 고백하는 말이지만, 후자는 성부와 성자의 위격을 혼동하는 말이다. 위격은 구별되지만 신적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넷째, 삼위의 관계를 왜곡하면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세 위격의 구별을 무너뜨리는 서로 다른 오류로 나아간다. 여호와의 증인은 요한복음 17장 3절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성부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피조물로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은 바로 이 구절을 다루면서, 예수님께서 중보자의 자리에서 성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고 해서 성자 자신의 영원한 신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기독교강요』 1.13.26). 실제로 같은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한 도마의 고백,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를 기록한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이어 믿음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성자에게서 신성을 박탈하는 공식으로 읽으면 요한복음 자체의 증언과 충돌한다. 반면 하나님의 교회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부·성자·성령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역사하신다고 가르치며, 여호와와 예수에 이어 성령 시대에는 새로운 구원자의 이름이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이 시대별 이름과 나타남으로 대체된다. 두 주장을 같은 교리라고 할 수는 없다. 한쪽은 본질을 갈라놓고, 다른 한쪽은 위격을 혼동한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둘 다 거부한다. 박진영의 설명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전자의 위험이다. 성부만을 최고의 하나님으로 놓고 성자를 그 아래에 둔다면,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 구별은 신성의 등급 차이로 변질된다.
요컨대 성경의 ‘한 하나님’ 고백 전체를 성부 한 위격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배타적 공식으로 축소할 수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이시지만,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지니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세 위격의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임을 고백하면서, 성부는 누구에게서도 나지 않으시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가르친다(2장 3항). 여기서 ‘나신다’는 말은 어느 시점에 태어나 존재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태양이 있는 한 그 빛이 언제나 함께 있듯, 성자께서는 시작 없이 영원히 성부와의 관계 속에 계신다. 물론 어떤 비유도 하나님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지만, 히브리서가 성자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라 부른 것도 이 진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영원히 성부와 동등하신 성자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기꺼이 성부의 뜻에 순종하셨다(빌 2:6-8). 그 순종은 본질이 낮아서 드리는 순종이 아니라, 동등하신 분이 사랑으로 자원하여 드리신 순종이다. 삼위 사이에는 영원한 위격적 관계의 질서가 있으나, 신성의 등급이나 존재론적 서열은 없다. 성부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위해 성자의 신성을 낮출 필요는 없다. 성자는 성부와 다른 위격이시지만, 성부와 다른 하나님은 아니시다. 다음 호에서는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는 최소 단위가 ‘혼(soul)’이라는 그의 네 번째 주장을 살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