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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부활,” 죽음의 패러독스

“부활,” 죽음의 패러독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활의 지침서로 탐독했던 고전인『마카베오』에  이성의 가치를 이렇게 나타냅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법을 어기면 책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악행 할 때 벌하는 것은 당연하다. 친구 관계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가 사악한 짓을 할 때 꾸짖는 것은 당연하다. 이성은 폭력적인 감정들인 허영심, 자랑, 오만, 악의, 그리고 권력욕을 지배한다.”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벌을 주고 책망하는 것은 역설, 즉 패러독스라고 설명합니다. 패러독스로 번역된 희랍어는 “파라독소스”인데, 낱말은 “파라”와 “독사”의 합성어입니다. 파라는 “옆 쪽에” 또는 “한계 넘어,” “반대하여”라는 뜻이고, “독사”는 “의견,” “생각,” 혹은 “영광”을 의미합니다. 패러독스란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한 견해라는 뜻입니다.

   옛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신기하고 놀라운 업적들을 패러독스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극심한 물 부족으로 고통을 당할 때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이적을 행했던 그 지팡이를 들고 가파른 암벽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암벽에 숨겨졌던 샘이 터져 급류처럼 흘러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암반이 수로로 변했습니다. 인간에게 예상할 수 없는 기이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즐겁게 행하시는 일들입니다. 이 문장의 원문은 “하나님께서 즐겁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사람들에게 패러독스다”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일반 사람들의 의견이나 생각을 뛰어 넘어서 놀라운 일들을 패러독스라고 말했습니다. 주후 2세기 로마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작가 루키아노스의 작품 속 “아름다운 히아킨토스의 슬픈 죽음에” 패러독스가 등장합니다. 아폴로는 스파르타의 왕자 히아킨토스와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머큐리가 아폴로를 만났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보여 “왜 그토록 슬퍼, 아폴로”라고 묻습니다. 그는 “내 사랑이 깨졌기 때문이야”라고 답합니다. 머큐리는 “정말 그랬겠구나”고 위로한 후 “네가 지금 원망하는 너의 사랑을 파경 맞게 한 원인은 무엇이야? 그가 죽었어?”라고 묻습니다. 아폴로가 “아아” 하고 슬픔으로 답하자, “아니, 그토록 아름다운 소년을 죽일만큼 더 사랑스럽고 위대한 경쟁자가 있어?”라고 머큐리가 재촉합니다. “그를 죽인 것은 나 자신이었어”라고 아폴로가 답합니다. 머큐리는 “아폴로, 너 미쳤어!”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실제 원인은 아폴로처럼 히아킨토스를 짝사랑했던 제피로스가 두 사람을 사랑을 질투해서 행했던 음모였습니다. 아폴로는 히아킨토스를 땅에 묻고, 그의 몸에서 흘린 피를 통해 지구에 있는 모든 꽃들 중에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게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죽음은 위대하고 숭고한 꽃으로 피어난다”는 원리를 패러독스라 표현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사람의 생각을 초월한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합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열매로 맺는다는 역설입니다. 이 패러독스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타나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지만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그 죽으심과 부활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역설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역설인 부활의 모습을 네 개의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죽음의 역설인 부활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 여인이 예수님의 묘를 방문했을 때 지진이 발생합니다. 그 때, 천사가 예수님의 묘 입구를 막고 있던 큰 돌을 옮겨 그 위에 앉아 있습니다. 천사의 모습과 형태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무덤을 지키던 경비원들이 무서워서 떨며 죽은 사람들처럼 땅에 달라붙습니다. 두 여인에게 “너희들은 무서워 말라”고 말한 천사는 “너희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고 있구나”라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께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내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제 삼 일에 살아날 것이다”는 것이라고 부활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난 후에게는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부활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영어 성경 KJV는 “He is not here; for He is risen”이라 번역합니다. 이 문장을 문법적으로 해석해 보면, “예수님은 현재 여기에 계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입니다. “He is risen 그는 살리심을 받았다”고 수동태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스스로 하신 행위가 아닌 누군가 죽으신 예수님을 살려 내신 것입니다. 살려 내신 행위자가 생략되었습니다.

   희랍 문학에서 이런 기법을 “거룩한 수동태, 혹은 하나님의 수동태 Divine Passive”라 부릅니다. 이런 문장은 행위자가 명백하게 하나님이실 때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고 쓰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님을 살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사건은 벌써 과거이기 때문에 “He was risen 그는 이미 살리심을 받으셨다”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은 지금 살리심을 받고 계십니다”라고 현재 시제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실, 더 정확한 표현은 무덤에 계셨던 예수님을 살아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옛날에도, 지금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죽은 자를 살려 내고 계신다고 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He has been raised.” 태초부터 시작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주체적 행위는 인류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는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죽은 자를 살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적었습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천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사랑스러운 제자들을 부르셨던 장소입니다. 배움이 없고 희망이 없는 제자들에게 인생에 사명을 불러 일으켰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온갖 병자를 치료했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 받았던 자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갈릴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 곳, 개인의 회복이 있는 곳, 용서가 있는 곳, 새로운 출발을 하는 곳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갈리릴에서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승의 죽음 앞에 충격 받고 희망을 잃고 절망 가운데 무너진 그들의 삶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지금도 지속됩니다. 부활을 경험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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