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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관용, “정당성 그 이상” 

관용, “정당성 그 이상” 

한국 성경 『개역개정』에 “관용하다”와 “관용”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낱말은 뜻이 애매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형용사 형태인 “에피에이케스”가 다섯번 언급되고 명사형인 “에피에이케이아”는 두 번 나타납니다. 히브리 성경과 희랍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하는데 평생을 헌신했던 제임스 모패트 교수는신약 성경에 언급된 7번의 이 낱말을 모두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합니다. 그만큼 의미의 폭이 넓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번역하면서 모패트가 선택한 낱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섯 번의 형용사 형태인 에피에이케스는 “인내” (빌 4:5), “인정 많은” (딤전 3:3), “달래는” (딛 3:2), “참을성 있는” (약 3:17), 그리고 “분별 있는” (벧전 2:18)으로 번역합니다. 두 번의 명사형인 에피에이케이아는 “우대” (행 24:4), 그리고 “남에 대한 동정이나 헤아림” (고후 10:1)으로 번역합니다.  영어 성경 NRSV는 이 단어를 일관성 있게 번역합니다. 형용사형은 “마음이 너그러운”로 번역합니다. 두 번의 명사형은  “습관적인 은혜” (행 24:4)와 “관대함”으로 번역합니다 (고후 10:1).

   이 단어가 신약 성경에 사용되기 훨씬 이전에, 이 단어는 그리스 사회와 문화 속에서 윤리적인 저술에 많이 쓰였습니다. 리차드 트렌치는  이 낱말에 관해 이렇게 씁니다. “에피에이케스와 같은 단어가 있다는 그 자체가 고대 그리스 사회는 윤리가 고도로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이 단어는 법적 권리의 주장과 결정이 오히려 사람들을 도덕적인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최고의 권리가 실제로는 최고의 피해를 가져오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최대한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된 문제의 부분 혹은 전체를 되돌아보아 법적 정당성의 부당함을 시정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사회가 인간을 위해 윤리적 가치와 결정을 법적인 규정 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구 사회 윤리의 뿌리가 되는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피에이케이아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옳고 타당한 것을 의미하는 에피에이케이아는 정당함 보다 더 우위에 있는  올바름이라고 정의합니다. 발생된 문제를 법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일반적인 삶의 원칙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이 때 법을 고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에피에이케이아입니다. 그는 에피에이케스 사람과 정의로운 사람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법적인 권리와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인 반면에, 에피에이케스 사람, 즉 관용의 사람은 법적으로 완전히 정당하지만 도적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분명하게 있어서, 그 누구도 자신의 합법성을 의심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권리를 과도하게 주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바른 인간의 보편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추구하고 따르는 법은 일반사회가 규정하는 정당성이 아니라 그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최선두에 두는 사람의 영혼이 인정하는 법 질서입니다. 

   희랍어 에피에이케이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 세계는 하나님의 성품을 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다. 나는 그리 쉽게 노하지 않으면 사랑과 진실이 큰 하나님이다. 나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잘못과 허물과 죄를 용서할 것이다.” 에피에이케스, 즉 관용의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특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을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용이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그리고 받는 사람이 그에 합당한 여부를 초월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관용이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을 갖도록 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입니다. 관용이란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공하시는 모든 탁월함의 총계를 의미합니다. 팩커는 하나님의 관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신뢰할 만함, 무한한 정의와 지혜, 다정하심, 오래 참으심, 그리고 회계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적으로 충분하심, 그리고 거룩함과 사랑 가운데서 신자들이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 고귀한 삶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숭고한 인자하심.”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내용물을 나열할 때,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라고 에피에이케스를 넣었습니다. 

    우리는 이웃보다는 자신의 법적 권리와 정당성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만약에 우리 삶의 태도가 나의 정당성이 아닌 하나님의 관용에 기반을 둔다면, 교회와 사회는 어떻게 변화될까요?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중국 교회의 지도자였던 위치만 리가 경험한 스토리입니다. 어느 해 여름 자기 교회의 한 성도가  논에서 황당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어제까지 물이 가득했던 자기 논에 물이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나락은 물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농부들은 논에 물을 가득 채워 놓습니다. 물이 모두 빠진 원인을 찾던 그 성도는 옆 논의 주인이 논두렁의 한 쪽을 삽으로 파서 물을 빼낸 사실을 발견합니다. 괘씸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시 물을 원상 회복시킵니다. 그 이튿날 논에 갔는데, 물이 또 다 빠져 있습니다. 그 성도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이런 괘씸한 양반이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물을 자기 논으로 돌려 놓습니다. 다음날 가 보니, 또 물을 훔쳐 같습니다. 그 성도는 이웃 논 주인을 찾아 가서,  “당신 그렇게 하면 안된다”며 따끔하게 혼을 내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맘이 편치 않습니다. 그날 저녁 “하나님, 제가 정당한 일을 했는데, 왜 마음이 편치 않습니까?” 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마음에 이런 깨달음이 옵니다. “너는 왜 정당성만 주장하느냐! 내가 너에게 보여 줬던 것처럼 위대한 삶을 살라!” 그 성도는 다음날  이른 아침에 논에 가서, 자기 논둑을 터서 이웃 논에 물을 대어 줍니다. 이상한 것은 자기 맘 속에 그렇게 큰 기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몇 일이 지나서 이웃 논 주인이 자신의 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왜 나 같은 사람의 논에 스스로 물을 대어 줬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날, 그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고, 그리고 이웃 논 주인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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