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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브런치코칭] 공감하는 리더가 되라

공감하는 리더가 되라

요즘 시대에 많은 이들이 쓰고 있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공감’ 이라는 단어이다. 21세기는 진정으로 공감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는 바로 이 공감의 능력이 부족해서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주변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추악한 이 세상을 향한 놀라운 ‘공감의 능력’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최고의 공감 능력을 보여준 탁월한 코치임에 틀림이 없다. 주님께서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함께 하셨던 이 땅에서의 탁월한 공감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최고의 공감 능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그러면 요즘 시대는 어떠한가? 지금의 시대에 이러한 탁월한 공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혹시 그러한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 그 해답을 이 땅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곳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감의 능력’은 바로 교회 그 자체가 가지고 있어야 할 필수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공감의 장소이자 동시에 세상과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이전의 시대에는 하나님과 목회자만 공감된 모습을 보여도 성도들은 그 모습을 인정하고 존경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타인의 목소리에 더 경청해야만 하는 지금의 시대는 공감 능력이 탁월한 기업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이제는 성도들의 목소리에 경청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퇴보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뜻한다.

당신은 혹시 지금의 시대를 탓하고 있는가? 솔직히 모든 사회가 쉬지 않고 늘 변화하는 유기체임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고 싶은가? 지금의 영적 리더들은 예전의 영적 리더들에 비하여 훨씬 안정되고 편리한 조건에서 사역을 하고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교회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사회 구조 그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 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시대를 아우를 수 없는 게으른 영적 리더와 그 교회는 퇴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자신은 늘 세상과 공감하고 있다는 모습을 타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통하여 수많은 ‘좋아요(LIKE)’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대체로 한 가지 커다란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 대부분이 현재의 상황이나 구조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전체적인 상황을 무시한 채 개인 혹은 작은 사건에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눈에 신선하고 호감이 가는 선택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세상과 공감’하고 있다는 즉 깨어있는 영적 리더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리더들은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늘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독교의 원칙에서 벗어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엉뚱한 선택을 종종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통찰력이 부족한 성도들 혹은 주변 사람들은 그러한 왜곡된 모습을 보고도 그에게 동조하거나 응원의 박수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그래서 요즘 세상이 온통 ‘공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지라도 영적인 리더는 어떠한 이슈가 될만한 일에 쉽게 반응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이는 ‘감정의 터치’에 집중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깊은 울림을 가진 그 ‘가슴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그 깊은 ‘가슴의 소리’를 들어 줄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세상의 슬픔과 위로를 넘어서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삶을 부요케 하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님” 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지 말고,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슬픔과 위로에 가볍게 접근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지금의 일부 양의 탈을 쓴 여우같은 영적 리더들이 보여주는, 즉 자신들만이 그 소외된 이들의 슬픔과 위로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보여주기 식의 자세를 몹시도 싫어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현재의 모습에만 집중하게 하여 눈가림을 시도하는 세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현재를 너머 미래까지도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이 우리를 현재의 환영 속에 묶어 놓고 그 덫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예수님은 현재의 슬픔과 고난에 대한 해결은 물론이고 미래의 축복까지도 더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리더라면 단순하게 성도들의 감정을 터치하거나 과거의 슬픔을 위로해 주려고 애쓰기보다는, 우리 인생 최고의 코치이신 예수님을 그들이 직접 만나게 함으로써 온전한 ‘삶의 회복’이 필요함을 깨닫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코칭 방식인 것이다. 세상의 코치들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허울뿐인 일부 크리스천 코치들이 절대로 범접할 수도 없는 그 영적 코칭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바로 ‘공감’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소외된 이들을 단순하게 지지하고 응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억눌리고 핍박당하는 이들의 텅빈 가슴을 ‘하늘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분은 절대로 성도와 타인들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겸손함으로 우리 자신처럼 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바로 진실된 ‘공감의 자세’ 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 리더인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오늘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그들의 아픔과 슬픔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그들의 영을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세상이 하는 것처럼 즉 눈에 보이는 식의 ‘공감하는 척’은 완전히 잊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들의 눈을 가리는 추악한 모습일뿐이다. 오늘밤 주님이 당신을 찾아 오셔서 “오늘도 너의 삶이 진정으로 성도들을 위한 공감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애썼냐?”고 물어 보신다면, 당신의 깊은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변하고자 하는가? 

피터정 마스터코치

GCLA 코칭협회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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