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유일한 희망이십니다!”-조대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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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골로새서 1:24~29

밴쿠버복음자리교회 조대호 목사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아주 특별한 성탄과 함께 지난 4주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나눠왔습니다. 특히 바울은 지금까지 골로새교회에 파고든 이단사상에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진정한 기쁨이 회복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다른 것을 취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바로 그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을 때에만 나타나는 진짜 크리스찬의 삶을 보여주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 서신을 통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에게 그리스도가 유일한 희망이십니까?”. 심오 하거나 그럴싸한 멋진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과거의 어떤 상황을 끌어들이지 말고, 지금 Yes/No로 대답해 보십시오. 

27절을 읽어봅시다 ”이 영광으로 가득 찬 계획에는 여러분 이방인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계획의 깊은 뜻은 ‘너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곧 영광을 얻을 유일한 희망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멘. 바울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면, 자신의 삶에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났을 것입니다. 24절 서두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도 내가 맡은 한몫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을 기꺼이 겪고 있습니다~”아멘. 우리가 잘못 읽었나요? 주님이 유일한 희망이라면,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오셨다면 ‘고난’이 아니라 형통이나 안정감이 넘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희망으로 확신한 바울은, 그 증거가 바로 ‘고난’이라고 역설적으로 자랑합니다. 만약 예수가 유일한 희망이 아니라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누구나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고난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골로새교회에 파고든 이단사상은 철저히 진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방법 보다는 세상의 방법도 문제 해결의 좋은 수단’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며 사는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한 가지 반응이 있는데, ‘내가’ 그 고난을 감수하고 있다면 우리는 복음 위에 세워진 사람들이고, 반대로 ‘서로에게’ 고난을 주고 받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다양한 희망 중에 하나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를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며 사는 진정한 크리스찬입니다. 24절 나머지 부분을 읽어 보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어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바울)으로 채워 가고 있는 것입니다”아멘.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다음의 두 가지 특별한 경험중에 어떤 기쁨이 더 크다고 여기시나요?,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을 때’ vs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을 살고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구나 이런 질문 한번쯤은 받아 보셨을 겁니다 “어떻게 예수 믿게 되셨나요?”. 바울도 예수를 믿게 된 회심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의 편지에는 회심한 상황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신을 불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를 통해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얘기합니다. 다메섹에서의 회심은 바울에게 평생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주님과의 첫 사랑이자 가장 중요한 간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때의 간증으로 예수를 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불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소위 ‘기적’을 통해 믿음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통해 믿음을 얻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기적을 통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영지주의에 빠졌을 것입니다. 누가 봐도 고난은 기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어나지 않았으면 싶은 것이 고난이겠죠. 그런데 주님은 이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예수 때문에 다들 피하는 고난을 기꺼이 환영하고, 고난을 통해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인정합니다. 그래서 내 의지와 힘이 아닌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주께서 어떻게 일 하시는지를 빠짐없이 경험합니다.

우리는 원래 희망이 없던 존재들이었습니다. 물리학자이면서 무신론자인 김상옥교수가 방송에서 ‘자신이 무신론자이지만 종교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은 왜 돼지 보다 소중한가?”라는 것을 생각해 봤다고 합니다. 사실 인간은 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돼지와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돼지를 가축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식탁에 올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면, 과연 그 권리는 누구에게서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때, 김교수는 “종교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생물체 중에서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바이러스에 취약하고, 사자와 같은 맹수나, 독사뿐만 아니라 모기 조차도 이기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그 상처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인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신의 지위를 이용한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방법이 아닌,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탄의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기쁨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살아계심과 복음이 변질될 수 없다는 증거로써 골로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순 되게도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고 있는 바울입니다. 주님은 이단사상의 거짓됨을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 고난 받는 바울을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5절)”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돕고 여러분에게 그분의 숨은 계획을 알리려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화려한 언변과 철학으로 가득한 이단사상에서 골로새 성도들이 돌아오게 하려면 근사하고 학자로서의 기품과 뛰어난 철학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을 보내줘도 부족할 판에, ‘고난 중에 있는’ 바울이라니…과연 이러한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의 마음이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요?…정답 바로 공개한다 “Yes”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독생자를 ‘잘생기고 주목’받는 꽃미남의 얼굴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12월25일 성탄절에 메트로타운에 만약 그날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못생긴 중동사람이려니’ 지나쳤을 겁니다. 실제로 (사53:2)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의 종이 실제로 마른 땅에서 돋아난 연한 순같이 형편없는 모양으로 자라났다. 여호와께서 그토록 기막힌 꼴이 되게 하셨다. 그의 모양은 아름답지도 않고 장엄한 것도 없었다. 도대체 우리가 부러워하고 매력을 느낄 만한 것이 그에게 하나도 없었다” 아멘. 예수가 이 세상에 희망이 되게 하시려면 누구나 주목할만한 외모를 주셨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 때 하나님을 심히 원망하며 살았었는데, 한참 사춘기 때 저는 이런 생각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만드셨나요?”…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심지어 목사의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것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때 저는 집사님들 가정의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적어도 그 친구들은 사사건건 “넌 목사 아들이잖아” 이 말은 않들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내 안에서 분노처럼 솟아 오른 이유를 저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는데 있어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저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 저를 구원해 주신 이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진노의 자녀로 평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저를, 주를 위해 목회하면서 주님을 통해 힘을 얻고 위로 받는 ‘행복한 목사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모태신앙이 아니었으면 저는 죄를 짓고 절대 돌아오지 안을 떠돌이가 되었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짓는 것을 이렇게 동경하는 저를 위해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원래는 저의 죄로 인해 제가 그렇게 죽어야 하는데, 죽을 저를 대신해 당신이 대신 죽으셨고,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을 부활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증인은 외모로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습니다, 증인은 그 사람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주목’ 받습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겪는 고난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겠노라 결단했다면, 이 고난도 그 결단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부딪치는 것이 관계에서 오는 고난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더 아플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아픕니다. 안타까운 마음, 답답한 마음, 속상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던 겁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셨죠다 (행9:4)”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예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왜 그러는지 몰라서 따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온 말씀이었고, 바울을 지금의 삶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 자신의 처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아직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바울은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핍박에 대해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승리자처럼 행세했다. 

  바울이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희망’이며 우리 모두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선언한 것은, 먼저 주님의 긍휼과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주님으로 인해 그 속에서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힘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가 잘 되어야 다른 것들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어려움도 완전히 극복하고, 좋은 결과가 나타나야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고, 그제서야 내 주위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괜찮아 보이죠. 하지만 진리의 복음을 만나게 되면, 이 고난의 과정 자체가 우리의 ‘간증이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바울은 여전히 복음으로 인해 ‘고난중’에 있었고 여전히 과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복음으로 인해 결론을 얻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는 ‘결론’이며 또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이며 과정인 예수님을 이단사상에 흔들리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다시 알리고 있습니다. (28)”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을 다해서 경고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 베푸신 일을 생각하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빌고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우리에게 결론을 보여주셨고, 다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는 자가 살아가야 할 과정’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그 과정속에서 ‘우리 주님이 유일한 희망이 되심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복음은 훈계가 아니다! 복음은 선언이다!”고 했습니다. 

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 우리는 무척 당황하면서도, 금방 끝나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12월이 되고 심지어 락다운까지 된 상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땠을까요?. 처음엔 놀랐다가도 어느 때에는 그 상황 자체에 적응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9개월 동안 기다렸던 소식이 무엇입니까?. ‘백신 개발’이었습니다. 캐나다도 12월부터 백신이 취약계층과 우선 대상자들을 위주로 접종 되기 시작했습니다다. 국가에서 “백신을 맞아 주세요”라고 부탁하거나 강요할까요?. 캐나다는 인구의 6배가 넘는 백신을 이미 확보했기 때문에 우리는 차례가 오면 백신을 맞을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라도 맞게 될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받아들여 주라’고 부탁하거나 요청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향해 ‘누구든지 받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숨이 멎어야 죽음인가요? 지금도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계3:1)에서 사도 요한은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전합니다 “네가 살아 있고 활동적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은 상태에 있다” 아멘. 주님이 왜 사데교회를 ‘죽은 상태’라고 얘기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그 안에 보이지 않다는 겁니다. 이런 사데교회를 주님은 책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는 길이 ‘오직 예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3)“네가 처음에 어떻게 들었으며, 또 어떻게 믿었는가를 돌이켜보고, 그것을 굳게 붙잡고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아멘.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게 합시다. 이를 위해 여러분이 보고 들었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우리가 흔들리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고 성경을 읽는 분량이 적어서도 아닙니다. 말씀속에서 ‘복음’을 찾지 않고 ‘해결책’만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철학과 지식이 말씀과 뒤섞이지 않도록 말씀이신 예수께 되돌아 가십시오. 그리고 말씀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이었는지 돌이켜 보십시오!. 위로와 격려도 은혜이지만, 책망과 권면도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들이 복음을 쉽게 접하고 힘들지 않게 영적인 삶을 세워갈 수 있을지 고민’했었습니다. 그런데 A.W.Tozer가 했던 말처럼 ‘헛된 바람’이었습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배푸신 은혜는 간단한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배푸실 때에 늘 전부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를 알았다면 강하게 붙잡으습시오!. ‘우리는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려니’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고난을 만나게 되거나 유혹 앞에서 주님께 실망하고 그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관계는 한쪽에서만 붙잡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9)”이것이 나의 임무입니다. 나는 내 속에서 강한 힘으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이 일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매일 ‘힘들다’고 불평과 투정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정혼은 했지만 동정녀로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는, 그럴싸한 방에서 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사람이 머물지 않고 가축이 머무는 곳에서 출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도 마리아도 불평하지 않았고 행복했습니다. 그 이유는 천사가 전한 이 소식 때문이었다 (눅1:28)”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이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아멘.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