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My Lord and My God (요한복음 20:24-31) – 윤재웅 목사(밴쿠버유빌리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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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ord and My God (요한복음 20:24-31)

윤재웅목사 (밴쿠버 유빌리지교회: 다음세대를 예수님께로, 다음세대를 세상속으로)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부활절을 전후로 사람들은 ‘Happy Easter’ Happy Easter! 라고 인사를 합니다. 행복한 부활절입니까? 왜 행복합니까? 왜 기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에 기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기쁜 것이지요. 기뻐야 합니다. 

2000년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 날 아리마대 요셉에게 가까운 친구가 핀잔을 줍니다. 

“자네 미쳤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마련해 놓은 자네의 장례를 위한 무덤을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에게 주다니…” 

아리마대 요셉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괜찮아 3일 동안만 잠깐 쓰고 돌려 주시겠다고 하셨거든…” 우스운 예기지만 역사적으로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Happy Easter”하며 인사하지만 왜 “Happy Easter”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도 “Happy Easter” 하며 인사합니다. 성탄절의 참 의미를 모르면서 “Merry X-mas”하는 것처럼 그냥 따라하는 겁니다. 달력에서 휴일이니까요…다들 “Happy Easter” 하니까요…

그런데 21세기 오늘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도 별 의미없이 환호했던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뭘 타고 오셨지요? “나귀새끼”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길가에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구원하소서” 라는 외침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정말 열렬한 환영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에게 하나뿐인 외투를 벗어서 나귀가 지나가는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절망과 어둠, 가난과 식민통치의 억압속에서 신음하던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정을 다하여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는 적을 무찌르고 원수를 갚아주는 메시아였던 겁니다. 그들에겐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가 보이지 않고 백마를 타고 칼을 차고 입성하시는 예수로 보였던 겁니다. 그렇기에 호산나, 구원하소서!를 열열히 외치던 바로 그들이 강도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게 되었던 겁니다. 

믿음은 군중심리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호산나 구원하소서’하며 외쳤던 군중들보다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며, 말없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자신의 큰 재산인 옥합을 깼던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마리아’ 그 마리아의 모습이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성숙한 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에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특별히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가 나옵니다. 도마! 도마가 누구입니까?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 복음성가 가사처럼 도마! 도마는 의심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밤이 지나고 도마는 친구들의 곁을 조용히 떠났습니다. 어디로 갔느냐고요?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숨어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누구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냥 도마는 숨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도마가 의심이 많다고 해서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덜 사랑한 것일까요? 그건 결코 아닙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하여서 자기 목숨까지도 드릴 용기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14-16 에 보면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그가 있는 유대로 다시가자’ 라고 하셨을 때 도마는 그 길이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10:31에 보면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고, 10:39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가려고 했었기에 예수님과 일행은 그 위험을 피해서 요단강 동쪽으로 왔던 건데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11:16절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누가 한 말입니까? 수제자 베드로, 요한이 한 얘기가 아닙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한 예기입니다.

유대 땅 베다니로 다시 들어 가는 길이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할 길이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라고 외쳤던 겁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몸을 사리고 있는데…

궁금한 것은 질문하고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도마였지만 일단 알게 되면 몸을 사리지 않는 도마였던 겁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영성이 아닙니까? 요한복음14:1-4에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실 다른 제자들은 예수께서 어디로 가는지,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모두 잠잠히 앉자 있기만 했습니다. 그때 도마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요한복음14:5 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리고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요한복음 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가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의심이 많은 도마가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복음의 진수를 오늘날 우리가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후에 아마 도마는 친구들의 곁을 떠나 혼자 걸으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 말씀이 자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셨어!하면서 걸었을 겁니다.

오늘도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를,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녔고, 자기의 궁금증에 대해 직접 답해 주신 그 말씀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 후에 도마의 가슴을 얼마나 울렸겠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그것을 목격했고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그 혼란 가운데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어 떠났다가 친구들을 다시 찾아왔는데 친구들이 앞을 다투어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어!” 

“도대체 어떻게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손에 못이 박히고 허리가 창에 깊이 찔린 채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돌아가신 그 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분명 친구들이 잘못 보았겠지…”

그리고 도마는 외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 후로 8일 후에 예수께서 도마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27절에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28절 함께 읽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것은 100% 확신에 가득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믿음의 고백을 드리며 도마의 의심은 사라졌습니다. 의심의 작은 티끌 하나까지도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도마는 주님을, 그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 보았습니다. 어쩌면 가장 부러운 장면입니다.  다른 이들은, 아니 우리 모두는 도마와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지금은 보지 않고 믿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직접 만나 주신 이후로 지금까지는 보지 않고 믿을 때인 것입니다. 직접 주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분에 대해 들음으로 생기는 믿음이 훨씬 더 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 그 옛날의 도마처럼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밀려오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때론 이미 믿은 것 같은데 마음 한가운데 의심의 먹구름이 일어나 믿음을 떠나 어디론가 숨고 싶은 때도 있을 겁니다. 이것을 뚫고 나가게 해 주시는 힘이 곧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실 때 우리는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부활주일 전의 40일 동안은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경건과 기도와 고난의 절기입니다. 특별히 이번 한 주간은 고난 주간이고 성금요일을 지나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부분 부활주일 하루의 특별한 날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지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단 하루가 아닌 성령강림절까지 지속되는 일정한 기간입니다. 성경에서도 부활절을 하루가 아닌 일정한 기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일에 이르는 50일간을 The Great 50 Days, 기쁨의 50일이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교회력의 절기 가운데 가장 큰 축제의 기간으로 부활절의 기쁨과 잔치 같은 분위기가 그 후에 뒤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종식되고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리적인 논쟁과 문제를 정리한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에서도 The Great 50 Days, 기쁨의 50일, 이 절기에는 무릎을 꿇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라고 할 정도로 부활의 기쁨을 강조한 절기입니다. 마태복음9:15에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하신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 능력의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어찌 슬퍼할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The Great 50 Days! 오직 기쁨만 가득한 절기가 부활주일부터 시작해서 50일째 오순절 성령강림일로 마무리가 됩니다. 성령의 강림!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허락하신 그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은 성령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복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또한 복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면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의심이 많던 도마의 고백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 고백 이야말로 내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누구에게나 믿어지지 않고 때론 의심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도마에게도 그런 의심과 깊은 절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가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57에는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사망을 이기시고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사망을 무기로 온통 세상을 휘젓고 겁박 하던 사탄을 우리 주 예수님께서 굴복시킨 겁니다. 이 천지개벽의 사건은 2000년전 그날 그 아침, 동이 터오는 부활의 아침에 일어난 겁니다. 

창세 이래로 죽음은 온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죽음 앞에 절망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던가요? 죄와 사망이라는 인간이 풀 수 없었던 문제를 마침내 우리 주님 예수께서 부활이라는 복음의 칼로 끊어버린 겁니다. 그 부활 생명이 권능이 되어 의심이 많던 도마도, 초기의 사도들도 제자들도, 복음의 여인들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겁니다. 

골고다 언덕위의 십자가 아래서 오열하고 절망하던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부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한 점 후회없이 거친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한 것은 부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좁은 길, 협착한 길을 걷게 한 것도 부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는 증인의 길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걷게 한 것도 이 부활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실패한 제자들이 다시 소명의 길을 따라 달릴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생명과 권능을 체험한 사실을 제외하고는 달리 설명이 안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증인들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다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온전한 복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계셨다가 온전한 몸을 입으시고 사흘만에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거룩한 빛 가운데 참 복음의 시작인 죽음과 참 복음의 끝인 부활을 온전히 깨달았을 때 십자가 앞에서 도망하였던 사도들은 회복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44-48 입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흔들릴 수 없는 기독교의 견고한 두 기둥입니다. 그 중에 어느 한 기둥을 소홀히 여기거나 선택적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십자가와 부활 중에서도 부활이라는 기둥은 초대교회가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선포한 복음의 강조점이었습니다.  

1세기의 그들처럼 21세기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부활은 새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오랜 세월동안 선포해 온 옛 언약의 성취가 바로 부활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조롱하고 비웃을 때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세상이 틀렸고 예수님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복음을 거침없이 선포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구약에 기록하고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이 신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5:3-8을 보면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참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오직 하나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뿐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축소하거나 추가하거나 약화시킴으로 조금이라도 변형시키면 누구든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된 소식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흑백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5:16-17에 보면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도 중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초대교회 때부터 구약의 성취로 선포한 복음입니다. 또한 이것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선포해야 할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 십자가와 부활을 기록한 성경을 우리 손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그대로 믿고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된 복음을 한 번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사실 현대 교회는 부활이 실종된 채 십자가의 속죄만을 주로 강조하는 복음을 전해온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가르침은 서방 교회의 전통이었고 그 전통은 한국교회의 교리로 자리 잡은 결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36-37에 보면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이 복음 선포를 들은 사람들은 거부할 수 없이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바로 얼마전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자리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부활의 복음을 감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38-41절의 말씀처럼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들은 완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초대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던 겁니다. 결국 이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초대 교회의 크리스천들은 어느 한 사람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의심하지 않았고 또 모든 인류에게 복음의 절박한 필요성을 의심한 자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몸소 체험하고,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대교회의 복음은 명료하고 단순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여신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섭리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셨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가 되셨다는 이 선언이 명료한 복음을 바치고 있는 핵심이었습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종말이다, 말세다,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인다라고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장기화 되어 가는 펜데믹 현상들, 대형화 되어 가는 자연재해들, 나라들 간의 탐욕과 전쟁, 가속화되는 기독교의 배척,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등 종말의 증거로 말하고 있는 일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종말의 증인이 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기둥의 복음을 확고히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기둥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때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견고해지기 어렵습니다. 

오늘 먼저 우리는 부활의 참 기쁨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감사합시다. 아무 의미 없이 Happy Easter! 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들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 주님이 정말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십니까? 의심 많던 도마의 고백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 고백이 당신의 고백입니까?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주님이 하나님이신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의미 없이Happy Easter하는 군중의 하나가 될 뿐입니다. 

성령님을 구하십시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고백에 합당한 매일 매일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절부터 7주, 50일The Great 50 Days 성령강림일까지 더 많이 묵상하며 더 깊이 기도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라기는 이 기간이 우리 삶에 성령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임을 마음과 입술로 고백하며, 무엇보다 삶으로 나타내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아리마대 요셉은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마련한 자신의 무덤을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께서 주말에만 잠깐 쓰고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알지 못했지만 기꺼이 내어 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지 않습니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고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장사 지내고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을 이미 알지 않습니까! 많이 들었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도 죽음 후에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과 마지막에 우리 모두 부활한다는 것을 아는데 뭘 그리 주저하십니까? 뭘 그리 움켜쥐고 아끼고 내어 드리기를 꺼려 하십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의 유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세)례를 베풀고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씀을 따라서 주변의 친구들과 온 민족과 열방들이 생명을 얻게 되는 일에 나를 한번 드려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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