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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구원자 예수(마태복음 1:21)_주님의제자교회 고영우 목사

구원자 예수(마태복음 1:21)

주님의제자교회 고영우 목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1)

제가 몬트리올에서 목회할 때 축구의 신으로 알려진 디디에 드로그바 (Didier Drogba) 라는 선수가 많은 연봉을 받고 몬트리올의 프로축구팀 ‘몬트리올 임팩트’로 이적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엄청난 구름 때 같은 환영 인파들이 운집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위해서 몬트리올에 왔을 때 한국 커뮤니티에서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 시즌에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하고 있나요. 자녀들이 타지에 있다가 밴쿠버에 있는 집에 방문하면 기뻐하며 좋아하면서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얼마나 기뻐하면 맞이하고 있는가요?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분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성인군자나 도덕의 완성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죄의 문제를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죄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죄와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보다 죄에 대한 내 생각과 판단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 성경에서는 죄의 종류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첫째로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오는 원죄가 있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2).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지으셨지만, 그의 죄로 인해 인류에 원죄가 흘러들어왔고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예외 없이 본질상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며 죄에 대해서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요16:8,9).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가 또 하나의 중요한 죄입니다. 세 번째로는, 원죄 때문에 파생되는 수많은 자범죄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만 봐도 약 스물 한가지 죄들이 열거되어있습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수군하는 것, 비방하는 것, 그리고 교만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구는 것 등의 자범죄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원죄에서 흘러나오는 자범죄들을 간단하게만 정리해도 일천여 가지가 넘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예수를 믿고 태어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면서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현대인들은 왜 죄를 인정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현대인은 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현대인들이 죄를 피해 가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첫째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현대사회의 문화적 흐름 속에서 나의 죄가 드러나면 나의 존재는 여지없이 추락해 버리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죄를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죄를 덮는다고 해서 덮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다음에 취하는 방법이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힌다는 명분 아래 인간의 행동에서 나오는 죄의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인간 무의식에 전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잘못을 규명하기가 쉬웠지만, 점차 인간의 행동 속에 과거의 어떤 상처로 인한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무의식에 책임을 떠넘겨버리려 합니다. 그것이 가난 때문에 받는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부모와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기는 무의식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의식 가운데 자리 잡은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적 치유 등의 사역을 통하여 인간의 상처가 치유되는 좋은 효과들이 있습니다. 상처가 생기는 원인을 잘 살펴서 그를 보듬어 안아주며 심리치료를 하게 되면, 상처들이 치유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심리치료의 긍정적인 좋은 점들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없는 길도 열렸으며 더 나아가 죄를 범한 사람도 같은 피해자로 취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한 상점에 권총 강도가 들어와서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오히려 주인이 쏜 총에 맞아 강도가 장애를 입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 권총 강도가 상점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하여 피해보상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재판관은 이 강도가 경제적으로 빈곤하여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피해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게 주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강도의 행각을 죄라고 보지 않고 극심한 가난이 그를 피해자로 만들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살인죄를 범한 여자가 재판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월경 증후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어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가 오히려 피해자가 되어 법정 처벌을 받지 않고 치료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살인자는 동료를 죽인 후에 심신미약의 이유로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심신미약에 죄를 씌워버린 겁니다. 인스턴트 음식을 과다 섭취하여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여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며 죄를 인스턴트 식품에 전가하는 일도 있습니다. 마약에다 죄를 전가하기도 하며 성도착증의 죄를 어릴 때 받았던 성적 학대에 넘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결과로 점점 범죄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범죄자의 인권이 인정받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죄는 사라지고 피해자들만 넘쳐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더 이상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것은 죄이니 회개하고 자유함을 얻으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요즘은 강단에서조차도 죄와 회개에 대한 메시지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죄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싶지 않아 합니다. 죄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이 떠나간다고 여깁니다. 더더욱 죄를 죄로 지적하지도 않습니다. 가해자를 가해자라고 말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피해자라고 얘기해 줍니다. 모든 것을 마귀와 사탄에게 떠넘겨버립니다. 어릴 적에 부모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니 부모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지 질책이 아니라고 말해 주라고 합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겁니다. 죄라고 말하면 회개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니 점점 회개가 없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눈물이 매말라 가며 십자가가 필요 없어져 갑니다.

2) 죄를 피해 가는 또 다른 방법은 내 죄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제공해준 곳이 교회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흠 없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죄를 전가하는 안수를 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하심이 없기에 제물에 죄를 전가하고 제물은 피를 흘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 사함의 거룩한 의식을 다른 차원에서 이용합니다. 즉, 나의 죄임에도 남을 탓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제물이 대신 죽어주니까 죄를 전가해버리는 현대인의 죄의 회피가 생긴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놓고 내 죄를 타인의 죄로 만들어 버리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상점에서 도둑질을 하고도 인색한 나의 아버지 때문에 도둑이 되었다고 아버지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오랫동안 하지 못한 한 남자가 음란 동영상에 중독된 것을 나에게 좋은 여자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탓하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떠넘길 수 있게 됩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 타인 때문이고, 하나님 때문이고, 교회 때문이라고 죄를 전가해버립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이 전가하는 죄가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자기의 죄를 하와에게 전가했으며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전가했습니다. 결국 현대인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면서 모든 죄를 피해 갑니다. 

3.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죄를 죄로 수긍하지 않으면 죄를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할 수 없기에 그 죄는 항상 나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천국에 갈 방법은 없습니다. 사탄의 역할은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하여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내가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여기게 하며, 죄일지라도 나의 죄가 아니며, 나도 피해자이기 때문에 계속하여 내가 죄를 지으며 살게 합니다. 이것은 교묘한 사탄의 전략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마귀의 일은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피해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회개할 때 임합니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죄 씻음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와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죄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백하고 용서받아야 할 일입니다. 죄는 떠넘겨야 할 일이 아니라, 나는 이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1장8절과 9절을 진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4. 용서받고 구원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우리는 나의 죄를 진심으로 자백하고 난 다음에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또 반복하여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내가 예수 믿은 그 날로부터 하나님은 나를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지만 우리는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나를 삼키려고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나는 용서 받았으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때마다 성령의 근심하심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니 주님이 나를 이끌고 천국까지 가신다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참으로 귀한 교리이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나를 더욱 살펴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마다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계신 예수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스크를 쓰기도 하고 손 소독을 자주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철저하게 코로나바이러스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 내려 애를 씁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죄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얼마나 그것을 이기려고 죄와 거리두기를 하며 영적인 마스크를 쓰며 영적인 손 소독을 하고 있나요?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신부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5.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

마태복음 1장 21절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한 죄들은 예수님이 다 지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바꾸어 주시고 주님의 나라로 우리를 이끌고 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죄와 싸우십시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죄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나도 죄의 피해자라고 하지 마시고 십자가의 능력을 붙잡고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며 죄를 이기려고 노력하십시오.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죄를 깨닫고 이길 수 있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회개하십시오. 천국 백성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6. 예수 믿으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크 트웨인의 작품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에 두 소년의 익살스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톰 소여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이모 폴리의 손에서 자라게 됩니다. 톰은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아무도 간섭받지 않으며 깡통 같은 곳에서 지내며 자유롭게 사는 허클 베리핀을 부러워합니다. 톰은 아침에 깨우는 사람도 없으며 학교 가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허클 베리핀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방과 후에는 둘이서 뗏목을 만들어 놀기도 하고 동굴에 들어가서 놀기도 합니다. 톰 소여는 자주 친구 허클 베리핀에게 ‘나는 네가 되고싶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 자유를 부러워합니다. 하루종일 강가에서 놀아도 저녁은 오는 법입니다. 톰의 이모 폴 리가 집에서 따뜻한 밥을 만들어 놓고 틀림없이 진흙탕에서 놀았을 톰을 위해서 따뜻한 목욕물을 데워놓고 문 앞에서 ‘Tom! it’s a dinner time! come back!’ 저녁 먹을 시간이다! 어서 돌아오렴’ 하고 톰을 부릅니다. 그 소리가 톰의 귀에 들려오면 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친구에게 ‘See you tomorrow’고 하며 집으로 뛰어갑니다. 따뜻한 물 속에서 먼지를 씻어내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천국에 있는 듯한 기쁨을 누립니다. 톰은 문득 그의 친구 허클 베리핀을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간섭받는 사람없이 세상의 자유인으로 살았던 허크는 불러주는 부모가 없기에 다시 그 어둠침침한 깡통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불편해 보이기도 합니다. 죄를 깨닫고 이기며 살아야 하는 삶이 때로는 억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죄를 멀리하는 것이 자유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나 인생의 끝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 세상에서 지내다가 하나님 만나는 마지막 날에 ‘It’s a dinner time. come back’ 아무개야~ 천국에서 널 위해 만찬을 준비해 놓았다’는 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올 때 우리는 아무런 미련 없이 ‘I am coming’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달려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때 주님의 나라에서 천국의 생명수에 내 죄의 몸을 씻고 천국 만찬의 자리에서 먹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죄가 죄 인줄도 모르며 살았던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와 벗 삼아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그 인생 마지막에 아무도 불러주는 분이 없어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날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그 주님께서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아직까지도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며 죄에서 어떻게 구원받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탄절은 우리 주변에 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명령을 돌아보아야 할 시즌입니다. “It’s a dinner time. come back!” 이라고 부르실 때 우리가 함께 “I am coming “하며 주님께 달려갈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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