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김진수 장로의 성공적인 실패] – 졸면서 영화 보기(6)

성공적인 실패 (6) – 졸면서 영화 보기

내 나이 서른 살 되던 해인 1986년 8월 15일, 나는 아내와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미국 행 비행기를 타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 뉴욕의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면서 나는 우리 앞에 펼쳐 질 새로운 삶에 대해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나의 유학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했고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당연히 우리 가족이 한 지붕 아래 모두 같이 살 줄로 기대했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부득이하게 아내와 아들은 장모님 댁에 살게 되었고 나는 학교 기숙사에 살게 되었다. 주말이면 나는 빨랫감을 가방에 챙겨 들고 지하철, 페리, 버스 등을 갈아타고 두 시간에 걸쳐 아내와 가족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면 다시 가족을 떠나 일주일 치 식량을 준비하여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런 생활을 우리 가족은 1년 이상 지속해야 했다.

한국에서 생활할 때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지만, 예상을 벗어난 힘든 미국 생활은 내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럴수록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내와 아들에게 당당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아내는 생선가게에서 열두 시간씩 힘든 일을 해야 했고 나는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유치원을 다니던 어린 아들은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한국어를 거의 사용할 기회가 없다 보니 1년이 지나자 한국어를 대부분 잊어먹게 되었다. 가족간의 대화 시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바쁘고 지친 삶은 가족 모두에게 시련의 시간이요 고통의 시간이었다.

미국 유학의 기회를 잡기는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 몸바쳐 일하던 한국전력에 사표를 제출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미국에서의 내 꿈이 좌절될 경우를 대비하여 일단 2년 동안 휴직하기로 결정하고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인해 퇴직금이 훗날 절반으로 삭감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2년 후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미국에 계속 거주하기로 결정한 후 한국전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당시 월급은 기본급과 수당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둘 다 거의 같은 금액이었다. 그리고 퇴직금 규정은 퇴직 시점에서 이전 6개월의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지불되는 것이었다. 2년간 휴직을 했기에 퇴직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그 동안 월급을 수령하지 않았으므로 기본급만을 기준으로 퇴직금을 지불한다는 해석이었다. 나는 이미 미국에 있었고 영주권도 없는 상태여서 귀국할 수도 없어서 회사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절반으로 줄어든 퇴직금을 받았다. 그 당시 거의 10년을 근무한 한전 직원의 퇴직금은 제법 큰 돈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도전할 때 생길 수 있는 위기는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너무 안정을 고려해 지나치게 소심하게 행동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깊이 빠져들었다. 교수가 프로젝트를 배정해주면 신바람이 났다. 나는 곧바로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대부분 마감 일주일을 앞두고 프로젝트를 마쳤고, 점수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점을 맞았다. 그러나 그 한 경우도 틀려서 점수가 깎인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충분한 설명이 누락되었다는 이유로 20점 만점에 19점을 받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나의 직업이기 전에 나의 취미였다.

영어로 수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외국어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 고충이 얼마나 큰지 능히 짐작할 것이다.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아서 강의를 기록하는 데 치중하다 보면 내용을 놓치기 일쑤요, 듣기에 집중한다 해도 어차피 이해하기도 어려우니 어느 쪽이든 난관에 봉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칠판에 기록된 강의 내용을 일일이 노트에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영어로 강의를 듣는 것이 어설픈 수준이라 수업이 끝나면 쉽게 연결되지 않는 수업 내용 때문에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는 마치 졸면서 영화를 보는 것과 유사하다. 영화가 끝나도 이야기가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결국 학교 도서관에서 그 연결 작업을 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침에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도서관에 들어갔다가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 1시가 되어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아마 그 당시에 도서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을 것이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한 학기가 지나가버렸다. 첫 학기는 네 과목 모두 A학점을 받았는데, 그 성적은 내 학교생활을 통틀어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그대로 성적에 반영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두뇌가 좋은 사람은 1등을 한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면 상위권에는 들 수 있다. 나는 전 학교 생활을 통해 1,2등을 한 적이 한번도 없지만 상위권에는 대부분 들었다. 삶은 벼락치기가 아니라 오픈북이다. 학교에서는 벼락치기가 통하지만 삶에서는 벼락치기보다 꾸준한 노력이 통한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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