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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진수장로의 성공적인 실패]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보았다

성공적인 실패 (5) –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보았다

컴퓨터 일을 워낙 좋아하고 거기에 몰입하다 보니 주변의 다른 직원들에 비해 일의 성과 면에서 점차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한국전력 연수원에서는 해외 기술연수 준비과정의 하나인 영어 연수과정이 있었는데, 저의 회사 부장님은 내가 그 코스를 밟을 수 있도록 나를 추천해줬다. 그리고 1984년, 나는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Harris사에서 4개월간의 기술연수를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언어장벽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는 컴퓨터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곳의 직원들은 기술유출을 우려했는지 우리를 경계하는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기술연수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나에게는 한 단계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기술연수를 받는 동안 컴퓨터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학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새로운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미국 기술연수가 없었다면 아마 미국으로 이민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술연수 기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함께 연수 받은 동료들과 미 서부를 관광하기로 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었기에 우리는 플로리다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이틀 동안 밤낮을 달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른 두 명의 직장동료와 합류하여 차를 대여한 다음 우리 일행 네 명은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 당시 나는 신용카드가 없어서 현금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를 분실하지 않기 위해 몸에 간직하고 다녔다. 내 딴에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고안해낸 숨길만한 장소가 바로 신발 창 밑이었다. 현금 400달러를 휴지로 잘 싸서 신발 창 밑에 단단히 숨겼다. 그래도 나의 불안은 사라질 줄 몰랐다. 수시로 몰래 숨겨놓은 그 돈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한 지 약 두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작은 타운에 들렀다. 그때 나는 신발 창 밑에 넣어둔 돈을 꺼내어 사용하기 편하도록 잠시 바지 주머니로 옮겼다. 점심을 먹은 후 쌓인 쓰레기를 치우면서 나는 내 호주머니에 든 잡동사니를 꺼내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곳을 출발한 후 두세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문득 내가 버렸던 호주머니 속의 휴지에 내 비상금이 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순간 난감했다. 혼자라면 차를 되돌려 가기라도 하겠지만 네 명이나 되는 일행과 동행하고 있던 상황에 차마 돌아가자는 제안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의 어리석은 행동을 그들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사건은 타인을 향한 불신으로 인해 내가 판 함정에 내가 스스로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경험이 되었고,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한 것이 불찰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기술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부산전력 관리본부에 새로 들어오는 SCADA 시스템을 설치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 업무는 미국의 공급회사에 고액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고 그 회사에서 파견된 직원에 의해서만 설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설치 작업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 달간의 고생 끝에 나는 시스템을 제대로 설치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패기에 찬 젊은 나를 미국에 파견하여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회사에, 나는 배운 기술을 성공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첫 보답을 한 셈이었다.

한국전력으로 복귀한 후로도 나는 SCADA 시스템 분야에서만큼은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 위해 여전히 박차를 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목표 아래 유학 준비도 병행했다. 영어 공부에 쏟은 노력에 비하면 실력 향상은 그리 두드러진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영어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2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미국의 뉴저지 주에 위치한 스티븐스 공과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대학들도 제법 지망했지만 토플시험의 성적이 신통치 않아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당시 주립 대학에 입학하려면 토플 점수 550점은 되어야 했는데 나의 토플 점수는 527점 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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