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김재유 선교사와 함께하는 원주민 선교 이야기] 3. 원주민의 세계관 (2)

김재유 선교사와 함께하는 원주민 선교 이야기

3. 원주민의 세계관 (2)

원주민들은 신앙심이 아주 깊은 민족으로, 그들은 경험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미주 원주민들의 깊은 내면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애니미즘(Animism)의 영향으로, 위대한 정령 (마니투, 와칸탕카, 와칸다 )은 인간뿐만 아니라, 해, 달, 별, 강, 바위와 같은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불, 바람, 벼락, 폭풍우, 계절 등과 같은 무생물적 자연 현상과 생물(동, 식물) 모두에게도 생명과 정령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어서, 특정한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능한 힘을 지닌 위대한 정령과 영혼의 불멸성과, 삶이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주변의 모든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서 정복하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공존해야 할 상생협력과 상호보완의 대상으로 인식했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과 우주만물이 자신의 형제라고 생각하며, 인간이 제아무리 논리와 능률을 갖추고 있다해도, 거부할 수 없는 “정령의 힘”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위대한 정령”이라는 신적 존재가 티피 (원주민 천막) 가운데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항상 그들 곁에서 그들을 보호하며, 돌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위대한 정령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림 참조).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정령이 주는 돌봄과 평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더 값진 것이라 여겼고, 복수보다는 보상을 더 좋아하면서, 그들은 적을 친구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원주민들에게는 남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굳이 위대한 창조주에게 묻지 않아도 알았습니다. 인생의 본분과 삶의 의미를 깨달아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지혜속에서 무엇이 옳고 최선의 길인가를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진실되고 명예로운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며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거짓됨은 허약함에서 나오는 겁쟁이의 행동이라는 신념에서, 거짓말쟁이를 경멸하였고, 오히려 가장 진실되고 명예로운 인간이 되려고 힘쓰면서, 먼저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렇게도 집착하고 염려하는 미래 (내일)를 신의 섭리에 맡기고, 그들은 치열하게 노력해서 무리하게 무언가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의 인도하심을 (각자에게 돌아올 그들의 몫이 신으로부터 주어지기를) 잠잠히 기다리면서, 번민을 물리치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능한 힘을 지닌 위대한 정령께 감사하는 마음이 곧 기도였고, 정령께 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의무였습니다.

원주민들은 소유에 대하여 매우 무관심했습니다. 들소 떼의 움직임을 따라서 평원을 이동하며 살아야 하는 원주민들은, 소유한 재산을 모두 가지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물건 (물질)에 대한 애착이 적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이동해야 한다면 여행 가방에 무엇을 넣을지를 한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아마 많은 것을 챙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저축이 무엇인지, 부동산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은 배고픈 자의 것이었고, 먹을 것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이 백인들에게는 소유한 것을 즉시 “흥청망청 소비하는 무사태평”으로 비쳐졌습니다. 어려울 때를 대비해 남겨두어야 할 양식을 큰 잔치를 벌여 먹어 치운다고 분노했던 백인들이 많았습니다.

원주민들에게 대지 (땅)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어머니의 넓은 품”으로 인식했습니다. 땅은 모든 생명체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인간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이주민들이 왔을 때에, 그들은 쉽게 이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주민들은 그 땅에 담장을 치고, 그
땅이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하였으니, 이를 본 원주민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류시화 시인이 쓴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의 뒷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시지요!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이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대지를 팔아야 한다면,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 공기 또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임을.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거미줄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그가 거미줄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르치듯이, 당신들의 아이들에게도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대지가 풍요로울 때 우리의 삶도 풍요롭다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대지에게 가해지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에게도 가해진다. 사람이 땅을 파헤치는 것은, 곧 그들 자신의 삶도 파헤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대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에게 속해 있다.”

그리고 어느 크리족 인디언 추장은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을 경계하면서,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후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힌 후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하며 탄식했습니다.

김재유 선교사 (알버타 사랑의 군대)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