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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아름다움 ② “사랑의 행위”

아름다움 “사랑의 행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사랑은 아름다움의 절정이었습니다. 에로스 사랑이 아름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주체적 의미와 목적을 혼동합니다. 에로스의 유익은 긍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에로스는 “행복에 대한 갈망”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보다는 매우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선 (善good)에 대한 갈망”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 갈망은 “영원히 선을 소유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확장합니다.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자손 번식을 위한 모든 성적 열정과 사랑은 불멸을 향한 열망으로 설명해야 한다. 유동적인 세계에서 열정적인 사랑만이 자신의 영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자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존속하는 자손을 낳기 위해 아름다운 영혼을 찾기를 열망한다. 그러한 영혼의 결혼은 그 어떤 육체적 결속보다 강하다. 이 기본적인 전주곡 후에 우리는 사랑의 신비의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다. 에로틱 절차의 올바른 방법은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거기서부터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으로, 마침내 아름다움이 소유하는 모든 질서 안에서 한 존재의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하게 된다. 연인들이  열망하는 사랑의 목적은 에로스의 비전을 얻는 것이며, 그 에로스의 존재 안에서 사는 것이 참된 삶이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움으로 사용되는 희랍어는 “칼로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선과 아름다움의 극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로스는 언제나 신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우주와 존재하는 모든 세계는 만물의 근원이며 본체이신 하나님의 지혜의 작품이며, 그 지혜는 만물 속에 최고의 선과 행복과 모든 미덕을 불어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와 이집트의 지혜를 답고 있는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에는 하나님의 본질은 선과 아름다움이며, 하나님의 선함은 사람들의 눈에 나타난다고 언급합니다. 그 아름다움과 선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네가 하나님을 알면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밝음과 좋으심을 알 수 있으리라. 그분의 아름다움은 어느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고 어느 신도 흉내 낼 수 없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것같이 그 선함과 아름다움을 알게 되나니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인 이것들은 그분과 교통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이다. 너희가 선과 아름다움에 관하여 하나님께 묻고 구하게 되면 얻게 되리라.” 이 글들의 본질적 요점은 아름다움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현재도 그 아름다움은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일상에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존재 양식은 사랑이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칼로스를 드러내기 위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두 메타포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목자이며 다른 하나는 젖먹이 여인입니다.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바벨론 포로가 되어 억압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이 깡마른 길과 같고 헐벗은 산과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풀밭을 준비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며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칼로스를 자기 양의 필요를 공급해 주고  그들을 보호하며 인도하는 목자의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고통스런 삶이 오래 지속 되면서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버리셨고 잊으셨다고 체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젖먹이 여인은 인간이 마음 깊은 곳에서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헌신, 희생, 그리고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모범입니다. 특별한 상황 때문에 여인은 아이를 잊을 수 있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며, 불편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 경험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름다운 시로 적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름다움의 최고봉인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과 교통을 통해서 전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삶에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실제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앞에 빛이 되며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사랑을 행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심판에 관하여 예화로 설명할 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행위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언제 우리가 이런 선을 행했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답하셨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 곧 하나님께 상을 받는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유대 사회의 스승이었던 랍비들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는 온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유대인의 경전인 토라는 사랑을 자선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자선 활동과 사랑의 행위는 율법의 모든 명령을 성취하는 것과 동등하게 중요하다.  그렇지만 자선 활동은 오직 산자에게 하는 것이며, 사랑의 행위는 산자와 죽은자 모두에게 하는 것이다.  자선 활동은 오직 가난한 자에게 하는 것이며, 사랑의 행위는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에게 하는 것이다. 자선 활동은 오직 돈으로 하는 것이며, 사랑의 행위는 돈과 자기 자신의 삶으로도 하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는 자선 활동보다 더 높게 평가 되었습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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