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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승리의 함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승리의 함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갑자기 예수님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분명했는지 요한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적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둥이 울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예수님께 말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에 모두가 충격을 받고 놀라며 감명을 받았지만, 그 경이로운 소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한은 십자가 위에서 들려오는 외침의 메아리를 듣는 그 순간 인간 내면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합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깊은 고통 속에서 스며나온 절규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주님의 고난 전체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감동적인 이 부분에 대해 심오한 묵상에 빠졌을 때, 그는 의자에 앉아서 똑같은 자세를 한 상태로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도 않고  깨어 있었지만 마치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마침내 신비로운 광산의 갱도에서 나온 사람처럼 깊은 생각에서 일어나 놀라 울부짖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셨으니, 누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스스로가 죽음의 먹이가 되셨던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경외심에 붙잡혀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셨던 동일한 언어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우리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문장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어느 정도 손상될까 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은 정말로  버림받은 것일까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조건 없이 순종하시는 자기희생의 순간에도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한 대상이셨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을 버림 수 있을까요?  이 문장을 설명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햐 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버리셨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비난에 대한 지옥 같은 선동에 대한 강력한 방어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순전한 믿음을 무너지게 하는 모든 감정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극한 고통의 때에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여”라고 부르는 것은 경험적으로 하나님만이 그의 구원자였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둘러 싼 지옥의 불이 자신을 덮칠것이라는 끔찍한 생각이 자신을 위협할 때,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아무 이름 없이 비참하게 영원히 거절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신의 의식속으로 스며들 때, 바로 이 순간 그분은 믿음의 방패를 든든히 잡고 이 무서운 정신적 환상과 악한자의 포악한 불화살로부터 도망쳐서 하나님의 팔에 안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과가 그분의 애절한 부르짖음의 진정한 의미가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며 나를 돕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주의 계명을 거역하였나이까? 내가 아직도 주의 자녀이며, 주의 모든 기쁨이 있는 주의 독생자가 아니니이까? 주는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겠나이까? 주는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시니, 나를 이 환난에서 구원하십니다. 주님은 주의 얼굴 다시 빛나게 하시리이다.” 불평처럼 보이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사실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과 승리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확신이 담긴 말입니다. 불평의 강도는 불평이 뿌리를 두고 있는 신앙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냉담하신 것같이 느껴질 때 실망을 토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싸움이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가져 올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왜 자신을 버리셨는지를 묻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격려와 위로을 줍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버림을 받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이 잠시동안 버림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영원토록 버림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영원토록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독생자가 잠시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또한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버리셨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손으로 그분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에게 숨겨져 있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그분을 안고 계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를 보지 못하셨지만, 아버지의 붙드심은 변함 없이 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들에게 숨겨져 있지만, 하나님의 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믿음의 끈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개입할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을 캄캄하게 하는 어두운 구름이 하늘에 없는 날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베일을 벗은 하나님의 얼굴을 날마다 바라보며, 매 순간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무엇이 우리를 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호의와 번영, 인간의 우정, 육체적인 힘들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나와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도 없고, 신앙의 어떤 생동감도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계시고 언제나 호의를 베푸십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하시고, 우리를 어떤 고난의 풀무에 던져 넣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하나님께 다가가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복된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한 당신의 자녀입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또한 더욱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당신은 나를 잊을 수 없고 (단순 미래), 나를 잊을 수도 없으며 (의지), 감히 나를 잊을 수도 없으십니다 (의도). 왜냐하면 당신의 독생자의 공로가 당신을 영원히 나와 묶어 놓기 때문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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