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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삶을 통째로 맡기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

 “삶을 통째로 맡기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

예수님께서 지상 업무 바로 직전에 하셨던 취임사 연설의 시작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미션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부연합니다.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못 보는 자들에게 다시 볼 수 있슴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려고 나를 보내셨다.” 이곳에 사용된 낱말 “가난한자”는 희랍어 “프토코스”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오신다고 했던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취임사와 같은 말씀을 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여라.” 예수님의 산상수훈, 즉 팔 복을 나열하실 때 첫번째가 가난한 자에 대한 언급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이 모든 경우 가난한 자는 희랍어 프토코스입니다.    

   고전 희랍어에는 “가난한 자”를 표현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번째 단어는 “페네스”인데, 이 단어는 단순하게 삶과 생활고로 고통을 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국가의 구빈법 (救貧法) 적용 대상자들로 극빈자, 빈민, 혹은 방랑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빈민자를 위한 구빈법을 다음과 같이 재정했습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고아와 나그네 그리고 과부는 고대 유대 사회에서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삶은 사회 구빈법으로 보호받았습니다.

   고전 그리스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페네스”라 불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한 제자와 그 당시 민주정치에 관해 대화합니다. “너는 현재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어떤 상태라 생각하는가?” 제자가 “빈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고 답하자, “그럼, 가난한 자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냥 가난한 자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너는 어떤 종류의 사람을 가난한 자로 그리고 부자로 각각 구별하여 부르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제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가난한 자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살 만큼 충분한 돈이 없는 사람들이고, 부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사고도 더 많은 돈을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없어 경제적 생활이 어려운 자가 페네스입니다. 다시 말하면, 풍족하게 사는 사람의 반대인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 자신을 페네스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생존할 당시 젊은이들, 특히 매우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니며, 그의 삶을 모방합니다. 그러자 지식인들이 그를 시기하여  화를 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가증스러운 자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 그의 성품이 페네스, 즉 형편없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한 번은 자신을 고발하는 자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참소하는 자들이 뻔뻔하게도 부끄러움도 없이 내가 누군가에게 금품을 요구하거나 강요한다고 증언하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빈곤하다는 진실에 관해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페네스는 사람의 성품이 가치 없어 경시할 때 사용하는 모욕적인 용어로 쓰였습니다. 

   빈곤을 의미하는 또 다른 희랍어는  “프토코스”입니다. 이 낱말은 “구걸하는 생활로 이끌다” 혹은 “누군가에게 구걸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프토쿠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프토코스는 단순히 경제적 빈곤이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자의 몸부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고 진정한 기아의 상태로 임박한 위험에 처한 비참한 빈곤을 묘사합니다. 페네스가 소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먹고 살기 위해 구걸하는 빈곤이라면, 프토코스는  극에 달한 빈곤으로 구걸을 통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낱말은 스스로는 노동이나  힘쓰는 일을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프토코스를 잘 드러내 보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언제나 가장 비싼 옷을 입고 매일 호화스럽게 살았다. 한편,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누워 있는데, 몸에는 부스럼 투성이였다. 그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기를 원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부스럼을 핥았다.”  호화스럽게 사는 부자라는 설명은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지를 부각시킵니다. 나사로는 스스로 활동할 수 없어 누워서 얻어먹었고, 개들이 와서 자신의 아픈 곳을 핥아도 쫓아낼 힘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프토코스는 살기 위해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을 둔 부모가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 모퉁이에 아들을 데려다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땅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진흙을 만드시고, 그 진흙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 바릅니다. 예수님은 조금 후에  그에게 “실로암 샘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씻자, 앞을 보게 됩니다. 눈 뜬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이 사람은 전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고 놀라며 묻습니다. 앞을 보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구걸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프토코스였습니다.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프토코스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뜻했습니다. 첫째,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나사로처럼 스스로는 생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정신적으로 부족해 남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같으면, 정신지체 혹은 정신 장애 환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세째, 고통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질병이나 어려운 사고를 당해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인생을 꾸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위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세상의 모든 도움과 자원이  닫혀 자신의 무력함과 비참함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통째로 맡기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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