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설교단상 루스의 들판에서(창28:10-19)_런던은혜교회 정삼열 목사

[설교단상] 루스의 들판에서(창28:10-19)_런던은혜교회 정삼열 목사

루스의 들판에서(28:10-19) 

런던은혜교회 정삼열 목사

오늘의 본문에서 야곱은 자신의 고향땅 브엘세바에서 쫓겨나와 하란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고향 브엘세바에서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명망 있는 족장의 자녀였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던 날, 형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 된 야곱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예정에도 없던 야반도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짐을 잘 꾸리고 넉넉히 여비를 챙겨서 장거리를 여행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갑자기 길을 떠났으니 그 짐은 얼마나 허술하며, 정신없는 상황이었는가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보편적인 관습이 있었기에 마을이 보일 때 쯤 멈추어 환대를 요청할 법도 했지만 야곱은 멈추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걸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초행길인데다가 지도는 커녕 동행도 없으니 열심히 걷기는 걸어도 어디쯤 왔는지, 바른길로 가고 있는지는 알수가 없었겠지요. 

오늘 성경은 그가 밤이 되어 지쳐서 멈춘 곳이 ‘루스’라는 곳이었다고 하는데, 루스든, 벧엘이든 B.C 3천년과 2천년 대 고대 근동지역 기록에는 정식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지명입니다. 아마도 루스가 히브리어로 아몬드를 의미하니 아몬드 나무가 많았던 한 지역의 임시지명이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루스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어딘지 모르는 곳의 들판 중간에 지쳐서 주저앉은 것입니다

펜데믹이 시작된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기간동안 우리의 일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계획했던 삶의 계획들은 수도 없이 변경되었고, 학교는 몇 번이나 문을 닫았고, 많은 사람들은 직장을 잃거나, 비즈니스의 위기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입은 성도들의 아픔과 슬픔을 다 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마음을 잠시만 공감하려 해보아도 민망하고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입니다. 

우리는 계획에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고, 쫒기듯 불안해하며 몸부림치며 살고있지만 문제는 여기가 어디쯤인지, 정확히 어디로 가고있는지, 언제쯤 이길이 마쳐지게 될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교회도 알 수 없는 국면 속에 서있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한 락다운 중, 교회는 오랫동안 자존심처럼 지켜왔던 예배당의 공간을 넘어서야하는 시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신학적인 고민이나 정책이 수립되기도 전에 자율에 맡겨진 채로 낙관적으로 시작된 온라인 예배는 어떠한 제약보다도 우리 자신의 느슨한 자유의지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온라인으로 드리더라도 시간과 공간, 자세를 정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해서 드려야 할텐데, 내가 익숙한 방식의 시간대에, 내가 편한 복장과 방식으로 드리다 보면 나중에는 결국 나의 편의에 맞춰진 예배로 변질되기 쉬운 것입니다. 동료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락다운 초기에 온라인예배로만 예배를 드리다가 방역단계가 완화되어 오프라인 모임을 재개하였을때 온라인 예배 접속자, 대면예배 참석자를 다 합쳐도 기존 예배드리던 인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부가 교회를 비필수 비즈니스로 구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신앙이 비필수가 되어가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이러한 시대에 과연 바른 목회는 어떤것이어야 할까요?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속에 신앙은 어떤 방법으로 변모해야 하는것일까요? 목회자인 저는 잘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 가끔은 어디에 서있는 지도 모호합니다. 오늘 펜데믹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들판, 낮선 길위 어디쯤에 멈춰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야곱은 밤이 늦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루스의 들판에서 노숙을 해야 했습니다. 그의 최선은 조금 평평한 돌을 머리에 겨우 기대는 것뿐이었지요. 골아 떨어진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재밌는 문장은 ‘그가 꿈에 본즉’이라고 표현한 부분입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처음 가보는 길이기에 안보였고, 그 여정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어서 안보였으며, 밤이 되어 온 세상이 어두워 안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보게 된 것입니다.
한 사다리가 하늘에 연결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장면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그 사다리 위에 서서 야곱에게 약속을 허락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때 야곱은 잠에서 깨었습니다. 16.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에서 야곱이 보통사람과 달랐던 점이 나옵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감탄사 ‘아켄’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유레카’처럼 삶을 전환 할 만한 것을 깨달았을 때 외치는 감탄사였습니다. 잠에서 깨면 보통 사람들은 ‘에이 다 꿈이었네’라고 비현실로 여기는 것이 보통일텐데, 야곱은 이 찰나의 비범함을 분별할 줄 알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삶이 망쳐졌다고 생각했고, 삶의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또 이 길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이 비참한 자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바로 이곳이야말로 하늘 사다리가 연결된 성전이요, 성소였음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이로다 하고
자기의 머리와 계획만 믿고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살았던 천둥벌거숭이였던 야곱이 하늘에 대한 경외함과 신비로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내 지혜와 힘으로 문을 내고 길을 내는 줄 알았는데,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자리에 문이 열리고 하늘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내 지혜와 판단이 철저히 실패한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집, 성소가 임하는 것을 본 것이지요. 지도가 아무런 소용없고, 지형 지물도, 길도 보이지 않는 한 들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니 역사적인 순간이요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에 야곱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위에 기름을 붓고 19.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성의 이름은 루스더라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을 보니 ‘샤캄’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단순히 일어나진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이 몸과 마음을 밀어내어 일으킨 것이고, 그 마음의 결심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바로 방금 전까지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성별하여 세우고 제단으로 삼아 기름을 붓고 예배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방금 전까지 베고 자던 평평한 돌, 고난한 여정과 열악한 오늘의 상징인 이 돌베게가 이제는 거룩한 예배의 제단이 되고 방금 전까지 방향을 잃었던 어두운 들판은 벧엘, 하나님의 집, 몇 번이고 가슴을 뛰게하는 삶의 이정표일뿐 아 니라 이후에 후손들의 영적 이정표로 변모한 것입니다.
즉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거룩한 성소요. 방금 전까지 베던 돌을 세워 기름을 부은 것이 예배였습니다. 즉 일상의 자리에 임하신 하나님 앞에 기름부어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예배요, 바로 성소와 성전의 본모습이었던 것입니 다. 주님의 임재가 임하면 혼돈으로 가득하던 우리 삶의 자리에는 빛이 들어오고, 삶의 이유가 생기고, 목적이 설정 되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도 방향을 잃고 지쳐 쓰러진 들판 어디쯤인지 모릅니다. 따뜻한 집과 나를 반겨주던 사람들이 그립고 서러운 자리. 밤이 어두어서 어딘지 보이지 않고, 마음이 어두어져서 앞이 보이지 않는 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불편한 바닥, 평평한 돌이 유일한 머리 기댈곳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해 주십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한복판이 거룩한 성소가 되고, 특별 할 것없는 일상의 도구가 예배의 제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 날 밤의 사건을 해프닝이라 부르지 않고 역사라고 부릅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 장소를 ‘루스’라 부르는 사람이 없고 ‘벧엘’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시면 시간이 지나 오늘 이 시간을 그 누구도 눈물의 골짜기요, 지친 길의 한복판이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복받은 자리 우리 삶의 벧엘이라 부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방향을 잃으셨나요? 지쳐 쓰러질 것 같습니까? 너무 비관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야곱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루스의 들판도 얼마든지 벧엘로 바꾸실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안에 계신 하나님도 우리의 눈물 골짜기를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친 삶에 찾아오셔서 눈을 열어 보게하시고, 삶의 의미를 주시고, 심령을 재창조하시고, 약속하시고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도 야곱처럼 그 자리에 돌을 세워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벧엘이라 부르게 될것입니다. 할렐루야!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위에 기름을 붓고 19.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름은 루스더라 

Advertismentspot_img
- Advertisment -

최신 칼럼

인기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