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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주를 향한 사랑이 모든 이유인 교회(요 21:15-23)_에드먼턴 온 교회 진성인 목사

주를 향한 사랑이 모든 이유인 교회(요 21:15-23)

에드먼턴 온 교회 진성인 목사

팬데믹의 위협이 전세계를 뒤덮기 시작한 2020년도 3월에 유엔총장은 팬데믹 뿐 아니라 “인포데믹(infodemic) 역시 우리의 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포데믹이란 정보라는 말 인포메이션과 세계적 대 유행이라는 단어 팬데믹의 합성어로, ‘잘못된 정보가 유행병처럼 퍼져 나가는 현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 초기였던 당시에 한국의 서울대 산하 팩트체크 센터에서 확인을 해보니 2020년도 초에 전해진 정보들 중 60%가 코로나 19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중 80%가 가짜 뉴스로 판명났다고 합니다. 시대가 혼란하니 가짜뉴스가 더 판을 친 것이지요. 우리 믿는 사람들도 가끔 가짜 뉴스를 발빠르게 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제목이다 선교지 소식이다 해서 확인없이 잘못되거나 허위로 작성된 뉴스를 전달하지 않도록 미디어를 책임있게 사용하는 것이 참 중요한 시대입니다. 긋뉴스 즉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의 신뢰도는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가짜 뉴스, 또는 잘못된 정보가 요즘 시대 이야기만은 아닌 듯 합니다. 

교회 초기,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가짜 뉴스와 잘못된 정보가 있었습니다. 가장 원조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 관련된 가짜 뉴스입니다. 마 28:12을 보면 대제사장들이 군인들에게 돈을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우리가 자는 동안 시신을 도둑질했다고 말하라 매수를 했죠. 그래서 군인들은 돈받고 대제사장들이 가르친 대로 소문을 내서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15절)고 마태는 증언했습니다. 대제사장발 가짜 뉴스였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속한 요 21장은, 부활 후 에필로그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이 에필로그가 쓰여진 데에는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즈음 떠오른 두 가지 화두 때문이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사도성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요한에 대한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재림시까지 요한이 살아있을 거라는 말이 잘못 퍼졌습니다. 22절에서 요한의 장래와 죽음이 궁금했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그런데 그 말이 와전되어 요한이 예수님 올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 잘못 소문이 나서, 만약 요한이 그 전에 죽으면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이 잘못된 정보가 가짜 뉴스로 번져 복음전파에 해를 주지 않도록 바로 잡으려고 요 21장 에필로그를 쓴 것으로 알려집니다. 

첫 교회 때부터 이런 오해들이 있었다는 걸 들으면 한숨이 납니다. 말씀이 충만히 역사되어야 할 교회공동체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말, 말, 말들 때문에 시험당할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험에 미혹되거나 흔들리지 말고 요 21장 에필로그에서 더 중요한 것을 찾아 가슴에 새기길 원합니다. 

바로 시몬 베드로를 향한 소명과 사명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예루살렘에서 두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다음 앞서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갈릴리에 가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로 가긴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전처럼 배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맘처럼 되질 않았습니다. 이미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 받은 소명 즉 콜링이 있다고 해도,  경험과 능력만으로 그냥 물고기를 낚을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새겨야 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성령과 말씀의 인도를 민감하게 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전에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쉽게 말하려는 유혹이 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라고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 파송받아 권능을 행했던 사람들인데요. 물론 그들은 체포되시는 예수님을 두고 도망쳤고 베드로는 심문당하시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보다가 자신이 위험해지자 세번이나 스트레이트로 부인했습니다. 철저하게 실패하고 두려움 속에 문을 닫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있었던 그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찾아오셨고 그들은 자세히 보고 만지며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라도 빨리 전해야 하니 전에 하던대로 나가서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고 병고치며 귀신을 쫓으면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주님을 통해 새로 태어날 수 있게되었으나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는 스스로 설수 없기에 Incubation Period(인큐베이터 안에서 보호받고 영양을 공급받으며 면역력을 기르는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전에 늘상 하던 고기잡이 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의 권능과 영이 함께 하지 않으면 보고 경험하며 익숙했던 것조차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어부 출신 제자들을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실 때 그들은 밤이 맟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 하다가 예수님이 지시하신대로 깊은 곳에 믿음으로 그물을 내렸을 때 물고기를 풍성하게 잡았지요.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후 갈릴리에서 또다시 이 일을 경험합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자신 있고 익숙한 것도 예수님 없이는 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소명 회복의 키워드는 무엇이었습니까? 익숙함? 경험? 실력? 지식? 그 무엇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의 거듭난 인생의 문을 여는 패스워드는 바로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시니 그들은 빈 그물질로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물고기를 가득 건질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부르심 받고 소명을 재확인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 제자들의 빈그물에 가득 잡힌 생선 중 일부를 숯불에 구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숯불에 구인 생선을 보며 베드로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바로 자신이 심문당하시는 예수님 먼발치에서 불을 쬐다가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순간일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처럼 찾아와 숯불에서 사랑으로 생선을 구워 먹여주시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평생 불을 피운 곳에서 마다 예수님을 배신한 생각에 몸서리를 치며 괴로웠을 것입니다. 요즘 캠핑가면 불멍한다고 하죠. 대부분에게 행복한 불멍이 베드로에게는 평생의 재앙 같았을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 최악의 기억을 사랑의 섬김으로 회복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나아갔을 때 만약 우리가 실패와 절망으로 얼룩진 상처 투성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복된 소식을 통해 생명과 평안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 없습니다. 내 마음도 지옥이고 내 문제도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누구에게 구원과 생명과 평안을 전할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버린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셨고 그들의 상처와 실패를 사랑으로 싸매어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마 26:33)다고 큰소리 치고선 예수님의 예고대로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회복하여 그의 소명을 새롭게 하시는 모습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앞서 말씀대로 최악의 숯불이 온기 가득한 사랑의 식사라는 긍정적 기억으로 회복되었고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15절의 질문에 답하게 하심으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심이 무너졌던 것을 다시 회복케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입을 통해 다시금 질문받고 답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실패의 경험을 회복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사랑을 확인하신 이유는 첫째로, 그에게 과거를 청산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갈릴리에서 세번에 걸쳐 사랑을 고백할 기회가 없었다면 그는 평생 3번 예수님을 부인한 기억에 사로잡혀 살 것인데 예수님은 그가 과거의 실패가 아닌 현재의 사랑 고백을 통해 새 출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물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른다고 자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에 고난과 위기가 오면 자주 흔들리고 때로 넘어진 우리들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위기를 맞았을 때 우리 각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혹 이 꼴 저 꼴 다 복잡하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는지요? 

겟세마네와 공회 뜰에서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도망치며 흩어진 제자들의 모습은 일상의 각처에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 하고 쉽게 현실에 타협하고 무너지며 내 유익과 당장의 편의가 먼저였던 우리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부인하고 포기한 만큼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거예요. 바로 그 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우리가 주를 부인한 만큼 기회 주실 때 대답하고 또 대답하며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르신 소명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는 첫번째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게 정말 너희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맞니?”

둘째로 예수님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십자가 사건 전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사랑은 대단했죠. 가족들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과거의 대단한 사랑이 아닌 현재의 진실된 사랑을 확인하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누구도 못 말릴 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섬겼을수도 있습니다. 때로 이런 말씀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예전에 제 믿음이 참 대단했습니다.” ”제가 청년 때는요, 제가 언제적에는요~~” 등등…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과거의 고백’ 말고 ‘미래의 결심’도 아니고, ‘오늘의 사랑 고백’을 원하십니다. 

부르신 소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사랑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사랑했거나 미래에 장차 사랑할 사람이 아니라 현재 뜨겁게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사명을 다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임을 알려주기 위해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들으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베드로를 향해 허락하신 사명이었고 우리 교회와 각 지체들을 향한 우리 주님이 주시는 사명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이 함께 모인 신앙공동체이자 그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온 맘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 힘다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부터 주신 말씀을 새 시대에 전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교회입니다. 

사랑의 사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일 4장 10절 말씀이 알려주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장 19절에는 더 짧고 굵게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했으니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해도 사랑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이라도 이처럼 사랑하시니까요. 그 사랑이 이제 우리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 존재의 이유이고 사명의 시작입니다. 주를 향한 사랑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의 전부인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압니다. 하지만 그 사랑보다 내 감정과 자아에 집착하며 살기에 우리는 사랑의 사명은 고사하고 내 옆의 배우자조차 온전히 사랑하기 힘든 연약함을 보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런 나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우리를 알고도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시고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남보다 거룩하고 경건해서가 아닙니다. 더 부족하여 그 사랑을 더 은혜로 알수 있기에 부르신줄 믿습니다. 그러니 더 겸손히 사랑의 사명을 감당하십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사랑은 먹이고 돌보며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받은 사랑에 합당하게 먹이고 돌보며 섬기고 인도하는 사랑이,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요 사명임을 기억하며,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부터 그리고 작은 삶의 자리마다 그 사랑을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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