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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엇구나] “제자도의 기초,” 순종 (2)

“제자도의 기초,” 순종 (2)

공관복음서의 모든 책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하나님 나라 일을 맡기셔서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인재를 등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선택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라 선발의 방식과 기준도 일반 기업이나 회사들과 달랐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 부르심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님께서 인재를 찾기 위해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고, 우선적으로 관심을 뒀던 인물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재 등용을 위해 뉴욕이나 서울과 같은 대 도시로 가시지 않고 어촌으로 가셨습니다. 위대한 하늘의 일을 이루기에 접합한 사람들은 어부들이었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은 문명이 발달되지 않아 모든 지역이 시골이고 어촌이어서 해변으로 가셨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학문과 상업이 상당히 발달된 지역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같은 큰 도시에는 높은 학문을 한 율법 학자들과 저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회당에서 일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국가의 고위 관리들로 종교 법과 외교에 능숙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어촌으로 가셔서 어부들을 등용했던 이유는 그들의 성품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너희는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요청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곧”이라는 희랍어 “유두스”는 “어떤 주저함 없이” 혹은 “어떤 의문도 없이” 옳은 일에 삶을 헌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40회 반복 사용된 “곧”은 어부들이 제자로 선택될 수 있었던 예수님의 기준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제자로 선택된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로 기대되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부, 농부, 그리고 사회에서 천대받았던 세리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지금까지 소중했던 직업과 가족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후에 복종이 무엇인지 이렇게 정의합니다. “복종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마음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에서 “복종하다” 혹은 “순종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들은 모두 “듣다”는 히브리어 “샤마”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샤마”는 “듣다”와 “순종하다”는 두 의미를 동시에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낱말은 단순히 듣는 것에 머물지 않고 들었던 것이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이런 원리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했던 유명한 말 속에 잘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샤마) 것을 좋아 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 (샤마)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처럼 듣는 것과 행함으로 순종하는 것을 한 낱말로 “샤마”라 했습니다.  듣는 것은 곧 순종으로 나타났으며, 순종이 있는 곳만이 진실로 들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고백도 이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샤마)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곳에서 “들으라”는 단지 주의하라는 의미를 넘어 여호와를 사랑하는 행위로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다”는 헬라어 “휘파코에”는 “샤마”를 근간으로 합니다.   이 낱말은 하나님께 들었던 내용이 인간 순종의 행위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셨던 행위가 곧 ‘순종’이다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유는 죄와 그 결과로 영원히 죽게 된 인간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 그분의 가르침, 그리고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일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태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의 형태를 본받는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자기 성취”와 “자아실현”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는 증오를 불러 일으킵니다. 한 개인의 정체성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다양성의 진가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나아갔을 때 그분의 정체성을 잃었을까요?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곧 좇아 갔던 베드로는 그의 정체성을 잃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난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인 것은 모두가 다 압니다. 그들은 자기부인의 행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자기부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자아실현과 자아성취의 참된 길입니다. 순종은 제자됨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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